
“가방 좀 열어주시겠어요?”
내가 서 있는 곳은 공항 검색대였고, 앞에 있는 사람은 보안검색요원이었다. 그는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방 속에 뾰족하고 긴 물건이 있어서요. 가방에 늘 넣어 다니던 수동드라이버였다. 대부분의 공구가 기내 반입 금지라는 사실은 공항 곳곳에 여러 언어로 적혀 있었지만, 드라이버는 내게 립밤이나 손수건 같은 일상용품이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국 드라이버를 내주고 검색대를 빠져나왔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쇠’로 된 물건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재활용 시스템에 그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수동드라이버를 가지고 다닌 지는 몇 해가 되었다. 집 밖에서도 드라이버가 필요한 순간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나무 데크나 계단에서 튀어나온 나사를 조여두면 누군가 다치거나 넘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길가에 버려진 가구에서 쓸 만한 철물이나 손잡이를 분해해 챙기기도 한다. 망가진 가구는 곧장 폐기되니, 이런 식의 ‘구조’는 자원순환에도 보탬이 된다. 여행지에서도 드라이버는 유용하다. 지난 여름 강릉의 한 숙소에서는 흔들리는 샤워기를 직접 고정해 사용했다. 덕분에 관리자를 부르거나 기다리지 않고 즉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우리가 머무는 공간 어디에나 나사와 철물이 있다. 문에는 손잡이와 경첩이 달려 있고, 벽시계, 장난감, 선풍기, 우리가 손에서 놓지 않는 휴대전화 안에도 수많은 나사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드라이버다. 드라이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가구에 쓰이는 다양한 철물과 나사
쇠로 만든 나사와 드라이버의 역사는 길다. 문헌 기록으로는 15세기 말 중세 유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산업혁명과 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일자(一)형 드라이버가 표준처럼 쓰였다. 직선으로 홈을 파서 만드는 일자 나사는 제작이 쉬웠고 활용폭이 넓었지만, 회전하는 접점이 두 개뿐인 구조 탓에 쉽게 마모되고 작업 효율이 떨어졌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한 것이 십자형 나사와 드라이버다.🪛 1930년대 미국의 헨리 필립스(Henry F. Phillips)는 기존에 개발된 십자나사의 형태를 재정립하고 특허를 받아 ‘필립스 드라이버’, 일명 ‘십자 드라이버’를 탄생시켰다. 그의 이름을 딴 PH(Phillips head) 나사와 드라이버는 자동차와 항공기 등의 대량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헨리 F. 필립스가 제출한 십자 드라이버와 나사의 도면(미국 특허 US 2,046,837-1936). 십자 형태로 깎인 드라이버의 날끝이 나사 머리 속 원추형 공간에 맞물리도록 설계되었다.
오늘날 가장 흔히 쓰이는 십자 나사 역시 PH 규격이며, 그중에서도 PH2는 가정과 사무실에 상비하는 표준 드라이버다 (번호만 따서 ‘#2’로도 표기한다). 커튼을 달고, 등기구를 고정하고, 문손잡이나 스위치 커버를 교체하는 일은 대부분 이것 하나로 해결된다.
그렇다면 일자 드라이버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까? 손목시계처럼 두께가 얇고 정밀한 기기에는 나사 머리가 얇은 일자 나사가 쓰인다. 전문가 외에는 뚜껑을 열어 들여다볼 기회가 없을 뿐이다. 한편 굵은 일자 드라이버는 지렛대처럼 틈을 벌리거나 박힌 못을 빼는 데 요긴하다. 통조림 캔을 따거나 호두를 깔 때에도 일자 드라이버를 쓰면 힘들이지 않고 가뿐하게 해결할 수 있다.
드라이버 비트를 손잡이에 끼워 쓰는 양용 드라이버. 한쪽은 PH2 십자 드라이버, 반대쪽에는 일자 드라이버 팁이 있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수동드라이버는 무언가를 뜯고, 벌리고, 해체할 때에도 기꺼이 동원된다. 단순해 보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한국에서는 1990년 후반부터 크롬-바나듐(Cr-V) 합금강*으로 만든 수공구가 대중화되었고, 덕분에 웬만한 힘으로는 부러지거나 휘지 않는다. 수동드라이버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쇠막대인 셈이다.
*크롬-바나듐강 : 철에 탄소와 크롬, 바나듐을 첨가해 강도와 내마모성, 탄성을 높인 합금강
공구 덕후로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주의이지만, 필수로 하나만 고른다면 양용 드라이버를 권하고 싶다. 5천원 이내로 저렴하지만 십자팁과 일자팁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 활용도가 높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미니 사이즈도 있는데, 휴대가 편할 뿐 아니라 비좁은 공간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고마운 친구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한 이래 점차 섬세한 움직임을 구사하도록 진화했지만, 여전히 살갗은 무르고 관절에는 염증이 생기며 사람마다 타고난 힘의 차이를 보인다. 대신 우리는 공구를 사용하며 저마다의 한계를 넘나든다. 공구, 즉 철(鐵)은 필요한 것들을 단단히 연결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단호히 해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처럼 강하고 믿음직한 존재를 가까이 하는 것은 생활에 이로울 뿐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효능감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양한 나사 헤드를 끼워 쓸 수 있는 휴대용 래칫 드라이버. 캐러비너로 가방에 달아두면 밖에서도 든든하다.
오늘도 나는 열쇠와 지갑을 확인하듯 드라이버의 무게를 가늠한다. 무엇이든 완벽하게 고칠 수는 없겠지만, 느슨해진 것을 조여볼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하루를 건너갈 용기가 생긴다. 세상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순간에도, 최소한 내 손이 닿는 범위 안에서는 다시 연결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야말로 내가 드라이버를 놓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모호연 작가
작가, 수리수선가. 일상적인 물건의 지속적인 쓸모를 탐구한다. 우산수리팀 '호우호우' 소속으로 우산수리 마스터가 되기 위해 매주 우산을 고치고 있다. 경향신문에 칼럼 「수리하는 생활」을 연재했고, 지은 책으로는 「반려물건」, 「반려공구」,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공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