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의 인식을 통해 조직의 리스크를 미리 읽는 ER(Employee Relations) 진단은 해외 사업의 안정적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ER 진단의 본질은 단순한 설문 분석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노무 리스크를 사전에 발견하고, 조직의 균열을 미리 포착하는 데 있습니다.
현대제철 역시 그룹 차원에서 공유하는 표준 진단 항목을 기반으로 ER 진단을 진행해 왔습니다. 특정 지표 하나에 집착하기보다는, 각 법인에서 어떤 항목이 어떤 흐름을 보이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피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어디를 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였습니다.
오늘은 현대제철 HR에 리포트 자동화를 제안한 임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가장 큰 병목은 '언어'

현대제철의 해외법인은 14개국, 17법인 9지사로 그에 따라 언어도 현지 정서도 각기 다르다.
과거에는 설문 데이터를 수기로 취합해 분석해야 했고, 이 구조에서 가장 큰 제약은 명확했다. 언어였다.
정량 데이터는 수치화 할 수 있었지만, 정성 데이터. 주관식 응답은 달랐다.
각국의 언어로 작성된 수많은 의견을 번역하고, 맥락을 파악하고, 다시 분석하는 과정은 현실적으로 감당이 어려웠다. 결국 주관식 설문은
아예 제외됐고, 직원들의 ‘라이브한 목소리’를 들을 창구가 사라졌다.
점수는 나왔지만, 왜 그런 점수가 나왔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업무는 돌아갔지만, 깊이는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AI 도입, 정성 데이터를 다시 열다
변곡점은 AI였다.
대형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을 기반으로 한 AI는 자연어 이해에 강점이 있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슬로바키아어 등 총 10개국의 언어로 주관식 응답을 별도의 번역 과정 없이 해석할 수 있게 되면서 그동안 닫혀 있던 정성 데이터가 다시 열렸다.
이 변화는 단순한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량 데이터와 정성 데이터를 교차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점수가 왜 나왔는가”에 대한 근거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의심도 있었다.
AI가 과연 직원들의 정서와 뉘앙스까지 정확히 읽어낼 수 있을지, 담당자는 직접 결과를
하나하나 눈으로 검증했다. 데이터와 해석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는 확신이 쌓였고,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신뢰도는 더 높아질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리포트 자동화가 바꾼 HR의 역할
AI 도입의 핵심은 ‘분석 자동화’가 아니라 ‘리포트 자동화’였다.
보고서 초안이 빠르게 완성되자, 담당자의 시간은 다른 곳에 쓰이기 시작했다.
숫자를 맞추고 문장을 정리하는 시간이 줄어든 대신 결과를 깊이 이해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조직의 관점에서 업무 효율화는 단순한 시간 절약이 아니다.
더 많은 일을 하거나, 같은 일을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드는 일이다.
AI는 HR의 역할을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HR이 본래 해야 할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기술의 장벽은 낮아졌다, 남은 건 마음의 장벽
AI는 특정 직군의 도구가 아니다.
조직 안에서 데이터를 다루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반복되는 업무로 피로를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도구다.
이 사례가 특별한 이유는, 담당자가 개발자도 연구원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무직 담당자였고, 코딩 경험도 없었다.
그럼에도 AI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스스로 업무를 자동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현대제철의 HR은 이 가능성을 실현했다.
AI를 비서로 활용하여 더욱 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적인 장벽은 이미 낮아졌다.
지금 남아 있는 건 “내가 해도 될까?”라는 심리적인 장벽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