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물질. 강철은 늘 그 중심에 있었다.
1697년, 대규모의 사절단이 러시아에서 꾸려졌다. 200명이 넘는 규모의 대사절단은 젊은 귀족, 기술자, 장인, 군인, 수행원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다. 사절단의 목표는 앞서가는 선진 문물을 배우는 것이었다.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방문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100대가 넘는 썰매가 이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이들 중 35명의 젊은 귀족과 기술자들은 특별 유학단을 구성했다. 조선, 항해 등 당시 첨단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특별 유학단에 속한 미하일로프 하사관은 네덜란드 자안담의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를 직접 배우고, 암스테르담과 영국의 조선소, 무기공장, 관측소, 조폐국을 바쁘게 다니며 견학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습도 했다.
<바레지나 전투에서의 바덴 기병(우사르)의 몰락, 1812년> ©Feodor Dietz
당시만해도 러시아의 산업은 서유럽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었다. 애국심 넘치는 러시아 청년에게 사랑하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 청년이 그 나라를 지배하는 왕이라면 더 말 할 필요가 없다. 표툐르 미하일로프는 사실 신분을 숨긴 표트르 대제였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 대제는 우랄 산맥 일대에 대규모 제철소와 무기 공장을 세운다. 서유럽에서 데려온 800명 이상의 기술자와 군사 전문가를 러시아에 정착시켰고, 서구식 무기 제조와 군함 건조 기술을 두입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의 무장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고,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강철 대국 스웨덴을 꺾고 발트해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며 제국의 반열에 오른다.
대한민국과 철의 역사, 그리고 현대제철
고대 히타이트가 최초로 철기문명을 열며 주위의 청동 문명을 압도했을 때부터, 철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철은 여전히 국가의 뼈대이다. 아무리 첨단 기술이 패권을 좌우한다 해도, 철은 여전히 불변의 전략자원이다. 그리고 국가 안보의 핵심이다.
한국이 산업화의 초입에서 선택한 첫 국가전략산업도 바로 제철이었다. 그리고 첫 제철의 명맥을 잇는 곳이 현대제철이다. 한국 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았던 1953년 6월 10일, 대한중공업공사가 설립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산업시설 복구와 국가경제 재건을 위함이었다. 당시의 주요 임무는 고철을 녹여 건설 자재와 산업용 철강재를 생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 철강산업의 모체가 되겠다는 각오만은 가득했다.
©현대제철
1962년, 대한중공업공사는 인천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꾼다. 8년 뒤 인천제철과 합병하며 사업 기반을 확장한 후, 1978년에는 현대그룹이 인천제철을 인수하면서 현대제철의 본격적인 성장이 시작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을 향한 국가 정책이 수립되면서, 철강은 국가 산업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인프라 건설을 위해 부족한 철강을 공급해야 했고, 여기에 현대그룹의 자본과 경영 노하우가 더해져 대규모 설비 투자와 생산 확대가 이뤄진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현대자동차그룹과의 결합을 통해 다시 한번 비상했고, 2010년 당진제철소는 글로벌 수준의 통합 제철소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다. 당진제철소는 연간 수천만 톤의 고품질 강판을 생산하며, 자동차, 조선, 방산, 건설 산업의 핵심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여전히 모든 것의 중심 – 철강
한 국가나 사회의 경제 발전 수준이나 산업화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표가 있다. 바로 1인당 철강 사용량이다. 철강은 도로, 교량, 철도, 항만, 발전소, 주택 등 사회 인프라와 산업시설의 필수 재료이다. 따라서 1인당 강철 소비량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전반에 인프라 투자가 활발하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됐음을 의미한다. 2024년 기준 세계 1위의 1인당 강철 소비량 국가는 한국이다. 무려 1,057킬로그램으로 2위인 대만보다도 200 킬로그램 가까이 높은 수치로, 그야말로 철강 강국인 셈이다.
현대전을 두고 초첨단 기술과 정보의 싸움이라고 한다. 다음 세계 패권은 AI 패권을 가진 국가에게 돌아갈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반도체가 필요하고 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견제와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기반은 여전히 물질이다. 그리고 모든 공정에 ‘철’이 들어간다.
에드 콘웨이(Ed Conway)가 말했듯이,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계는 철로 만든다. 전투기 하나가 이륙하기 위해선 수천 종의 특수 합금이 필요하고, 장갑차는 고경도 방호강이 없이는 설계조차 불가능하다. 미사일 격납고, 함정, 항공모함, 군수 창고, 철도망, 방공기지까지, 모두 철로 만들어진다. ‘강철’이라 하면 덥고 열악하고 지저분한 생산현장을 떠올릴 지 모르지만, 현대인이 누리는 모든 것은 철이 없으면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
안정된 철강산업은 곧 국가 안보에 직결된다. 코로나 이후 공급망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 이후, 모든 국가가 공급망 안정에 뛰어들었다. 철은 일찍부터 미국의 전략 산업으로 분류되었다. 이미 첫번째 임기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철강과 알루미늄에 25%의 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정책은 바이든 대통령 시절에도 바뀌지 않았다. 두 번째 임기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철강에 대한 25% 관세 카드를 쉽사리 내려놓지 않고 있다. 과연 그것이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의 일자리 때문만일까? 수익이 나지 않고 쇠락했음에도 미국 대통령들이 US Steel의 매각을 주저하는 것은 철강 산업이 그 나라 산업의 허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Charles Clyde Ebbets
보기만해도 아찔한 높이에 떠 있는 철강 빔 위에서 여유로이 점심을 먹는 노동자들. ‘Lunch Atop a Skyscraper’라는 제목의 이 유명한 흑백사진은 1932년 뉴욕 록펠러 센터 건설 현장에서 연출해 촬영한 사진이다. 1932년은 대공황의 여파로 한창 힘들 시기였다. 사진에는 어려운 시대를 이겨내겠다는 의지와 함께 미국 도시화와 산업화, 노동자의 용기와 이민자 정신이 담겨 있다. 철강만큼 단단한.
앞으로 몇 나노의 반도체가 나오더라도, 인간을 위협하는 AI가 나오더라도,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철’이라고.
소개
김지윤. : 정치학자이자 방송인, 평론가,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약 12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김지윤의 지식Play’을 통해 역사, 인문, 영화, 음악, 미국 정치 등 폭넓은 주제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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