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쾌적하고 개운한 일상을 위해, 나는 지퍼 앞에 신중해지기로 했다
포틀랜드의 스케이터들 (ⓒ Sean Benesh)
블랙 가죽 재킷의 금속 지퍼(ⓒ Anna Evans)
그 스케이터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보드 데크 위에 올려놓은 왼발과 땅을 박차는 오른발이 이루는 각도. 군데군데 닳아서 해진 바퀴. 물 빠진 데님 팬츠와 검은색 보드화.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펼쳐지는 후드 집업의 밑단. 지퍼 두 개 중 상단은 잠겨 있고 하단은 열려 있는 모양새가 왜 그렇게 멋있었을까. “그게 투웨이 지퍼라는 거야.” 옷을 잘 입는 친구가 말했다. 새로운 세계 하나가 열린 기분이었다. ‘훈남 패션’ 따위를 검색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20대 중반의 김정현 군이 처음으로 지퍼라는 부자재에 관심을 두게 된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그전까지 내게 지퍼는 성가신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어딘가 걸리고 빠지고 부러져, 짜증 날 때만 그 존재감을 인식했던 까닭이다.
내 일상의 적지 않은 부분이 지퍼에 빚지고 있다. 어떤 스타일의 상의와도 조화를 이루는 치노 팬츠, 8년째 멀쩡하게 사용 중인 백팩, 쿠션감과 수납력 모두 갖춘 맥북 케이스, 여행 짐을 꾸릴 때마다 빼놓지 않고 챙기는 속옷 & 양말 전용 파우치… 지퍼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주제에 나는 유용함은 그냥 지나치면서 불편함에는 호들갑으로 반응했다. 인간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는 종족이다. 소중함을 잊은 자는 익숙함의 부재 앞에서 뒤늦게 몸서리치는 법이다. 지퍼라고 예외는 아니다.
기데온 선드벡 (ⓒ Wikipedia)
기데온 선드벡이 1917년에 개발한 ‘분리형 잠금장치’(지퍼) 특허(ⓒ Wikipedia)
지퍼가 막 보급되던 시절의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방향의 호들갑을 쏟아냈을 것이다. 단추보다 채우기 쉬운 잠금장치라는 혁신의 혜택을 하루하루 체감했을 테니까. 지퍼를 처음 만든 사람은 1851년에 자동 연속 옷 복합 장치 특허를 받은 미국의 발명가 일라이어스 하우(Elias Howe)다. 이 발명품의 아이디어를 살린 게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열쇠 후크식 지퍼를 출품한 윗컴 저드슨(Whitcomb Judson), 저드슨의 지퍼를 개선해 실용화한 사람이 스웨덴계 미국인 엔지니어 기데온 선드벡(Gideon Sundbäck)이다. 선드벡이 탄생시킨 현대 지퍼의 최초 고객 중 하나가 미군이었다고 하니 당시 금속 소재로 만든 지퍼의 기술적 가치가 얼마나 높게 평가됐을지 짐작이 간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대량생산의 포문을 연 지퍼는 1930년대 들어 의류 산업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방과 재킷, 청바지 등의 제품에 사용되며 빠른 속도로 보편화됐다. 강철 같은 합금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던 지퍼는 오늘날 비슬론 지퍼라고도 부르는 플라스틱 지퍼, 나일론 섬유를 활용한 코일 지퍼 등 다양한 방식으로 뻗어나가며 각자의 특성과 용도에 따라 적재적소에 쓰이는 중이다.
1948년 리리(riri)사의 캠페인 이미지 (ⓒ riri)
YKK사의 금속 지퍼가 달린 재킷(ⓒ Anne Nygård)
최초의 지퍼를 선보인 미국의 탈론(Talon)부터 고급 지퍼의 대표 주자인 스위스의 리리(Riri)와 이탈리아의 람포(Lampo), 중저가 브랜드를 공략하며 빠르게 성장세를 기록한 중국의 SBS까지 저마다의 캐릭터와 전략을 지닌 지퍼 제조사가 글로벌 지퍼 시장의 질서를 이룬다. 그중에서도 국내 소비자에게 가장 익숙한 회사는 일본의 YKK 아닐까? 약 50%라는 압도적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며 준수한 지퍼 품질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된 YKK는 패션 유튜버를 찾아보는 남성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지금 당장 지퍼가 달린 물건을 찾아 뭐라고 쓰여 있는지 들여다봐도 좋겠다. 지퍼에 적힌 YKK라는 세 글자가 당신 물건의 모든 걸 말해준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높은 품질의 지퍼를 사용한 물건의 만듦새에 ‘싸구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완성도란 어느 한 영역의 점수로만 평가되는 지표가 아니다.
지퍼라고 다 같은 지퍼가 아니니까
2024년에 모 세컨핸드숍에서 구매한 카키색 코튼 팬츠는 내 인생 바지의 반열에 올랐다. 원단과 색감과 사이즈와 가격 모두 만족스럽다. 구매하기 전 유일하게 걸렸던 부분은 바지 잠금장치가 지퍼가 아닌 버튼 플라이 방식이었다는 거다. 입고 벗을 때마다, 화장실을 드나들 때마다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을까 싶어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단추를 쉽게 채우고 빠르게 풀 수 있어서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난처하게 만든 건 얼마 입지도 않았는데 지퍼 이빨이 금세 어긋나버린 가성비 청바지다. 슬라이더가 자꾸만 덜그럭거려 쓸데없이 기운 빠지게 만든 패딩 지퍼도 마찬가지다. 의심 한 번 하지 않았던 친구가 어느 순간 눈에 거슬리고 불쾌해지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러니까 슬기로운 의복생활을 누리고 싶다면 다름 아닌 지퍼를 확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부드러운 움직임과 최소한의 내구성을 갖춘 지퍼를 고르기. 1등은 못 되어도 품질의 하한선만큼은 단호히 지키는 지퍼를 고르기. 그걸 선택하는 기준은 제조사의 인지도가 될 수도, 소재 종류와 제작 방식이 될 수도, 자기만의 다른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금속 지퍼 레일 (ⓒ Ian Talmacs)
YKK 지퍼를 사용한 칼하트 가방(ⓒ Vlad B)
사소한 불편만 줄여도 일상은 개운해진다. 겨우 지퍼 하나 달라지는 것도 그렇다. 어쩌면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스케이터니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놨을지도 모른다. 좋게 말해 사소한 불편이지 불편은 짜증이 된다. 짜증은 스트레스가 된다. 스트레스는 만악의 근원이고, 나는 바지와 백팩과 파우치 외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중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조금이라도 스트레스 덜 받는 일상을 누리기를 바란다.
소개
김정현 : 프리랜스 에디터. 주로 도시의 흥미로운 장소와 콘텐츠를 소개한다. 취향에 관한 에세이 ≪나다운 게 뭔데≫를 썼다.
인스타그램 : @kimjeonghyeon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