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망했다. 3억 빚까지 떠안았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여동진 대표를 살려낸 건 ‘철제 간판’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철에 세월의 흔적을 입히자, 브랜드의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철제 간판 브랜드 플레져(PLZR)는 지금까지 오천 개가 넘는 간판을 만들며,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간판’을 만들기 위해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뭐든 일단 해보자’라며 달려든 여동진 대표의 기질은 결국 인생의 돌파구가 되었다.
‘왜 다 똑같지?’ 철제 간판에 꽂히다
지금까지 오천 개 넘는 간판을 만들었다고요. 간판 제작의 첫 시작이 궁금해요.
원래 광고대행사 프로모션 팀에서 일했어요. 그때 맡았던 게 ‘슈퍼스타K 3’였죠. 규모가 엄청 컸어요. 클라이언트들도 다 대기업이었고요. 그때 광고주들이 제가 일을 잘 하는 것 같으니 회사를 한 번 차려보라고 권하시더라요. 그 후 회사를 차렸는데 10개월도 못 버티고 쫄딱 망했어요. 3억 빚을 졌죠. 그땐 ‘아, 난 끝났다. 나 같은 건 죽어야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3억이요?
정말 말도 안 되죠. 제 인생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전 여자 친구가 가로수길에 옷 가게를 차린다는 거예요.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내가 간판이라도 만들어 줄게.’ 하면서 처음 간판 작업을 하게 된 거예요.
왜 하필 간판이었어요? 원래 만들 줄 알았어요?
처음이었어요(웃음). 이상하게 간판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브랜드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잖아요. 대행사에서의 브랜딩 경험도 있었고, 공연장 무대를 세팅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고요.
간판 소재가 여러 가지잖아요. 특별히 '철제 간판'에 꽂힌 이유가 있어요?
거리 간판을 보니까 대부분 아크릴 소재로 만들어졌더라고요. 남들과 다르게 ‘철로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한 거죠. 또 결정적인 계기가 하나 있어요. 을지로에서 40년 된 냉면집 간판을 봤는데, 전통 있는 집인데도 간판이 세월을 전혀 담지 못했더라고요. 사람들은 ‘철’하면 스테인리스처럼 반짝거리고 새것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잖아요. 저는 반대로 ‘철은 시간이 묻을수록 더 멋있다’라고 생각했어요. 녹을 없애는 대신, 어떻게 하면 빨리 녹슬게 할 수 있을지를 연구했고, 그게 플레져의 시작이었어요.
플레져 사옥 내 작업 공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한 거예요?
맨땅에 헤딩한 거예요. 보기보다 곱게 자라서 공구도 못 다루고, 사다리 타본 적도 없었거든요(웃음). 철을 연구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철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철이 아니라는 걸요.
부식 처리 한 간판
일부러 녹슬게 만드는 방법은 어떻게 찾았어요?
그 당시엔 부식 철제 간판을 만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물어볼 곳도 없었죠. 철을 직접 구해서 표면 코팅을 갈고, 소금물도 뿌려봤어요. 해보니 녹스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거예요. 방법을 찾으려고 을지로 화학 약품 가게에 찾아갔어요. 사장님께 철을 부식시키려면 어떤 액체를 써야 하냐고 물어보니 염화철, 황산, 염산 등 여러 가지를 알려주시더라고요. 전부 다 사서 밀폐된 공간에서 철에 부어봤어요. 다음 날 가보면 조금 녹슬어 있더라고요. 하나씩 시험해 가면서 방법을 찾았어요.
녹슨 철제 간판이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무조건 된다!’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만드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당시 ‘녹슨 간판을 만들고 싶다!’하시는 분들은 저를 찾아왔어요. 간판 업계에서 30년 일한 분도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거냐?’라며 물어봤을 정도니까요. 경쟁사가 없으니까 부르는 금액대로 간판 값이 올라갔고요. 남들과 다른 걸 시도하다 보니 플레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철의 시간, 브랜드의 얼굴이 되다
간판 제작 공정 과정이 궁금해요.
제일 처음에는 간판 제작을 의뢰한 점주의 현장에 가요. 간판은 브랜드의 업종이나, 공간 분위기와 어울려야 하니까요. 현장을 보고 어떤 간판이 어울릴지 판단하죠. 밤에 두각을 드러내야 하는지, 낮에 눈에 띄어야 하는지도 다르거든요. 그다음에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디자인을 합니다. 간판 소재는 현장 분위기에 맞게 *갈바나 **스텐 같은 소재를 고르고요. 이후 레이저 각인, 마감, 조명 작업까지 거쳐 완성해요. 보통 하나 만드는데 2~3일 정도 걸려요.
*갈바(갈바나이즈드 강판): 일반 철판 표면에 아연을 입혀 녹에 강하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소재.
**스텐(스테인리스 스틸): 크롬과 니켈을 합금해 만든 강철로, 부식에 매우 강하고 위생적이며 내구성이 뛰어난 소재.
가장 중요한 공정 과정은 무엇인가요?
디자인, 레이저 작업, 마감, 부식 등 모든 과정이 중요하지만, 간판이 달릴 매장을 파악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그리고 매장 주변 상권을 잘 살펴봐야 해요. 간판이 돋보이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한 거리에 비슷한 분위기의 철제 간판만 가득하다면, 오히려 다른 걸 제안하는 게 좋거든요. 점주 입장에서 내 간판은 특별하고 싶잖아요.
‘갈바’와 ‘스텐’ 소재를 주로 사용한다고요. 두 소재의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갈바는 가성비가 좋아요. 기본 뼈대를 짓는 자재라 도장도 가능하고요. 웬만하면 다 갈바로 하죠. 스텐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감이 돼요. 비싸지만 녹이 안 슬고, 내구성도 최고예요.
오랜 시간 철제 간판 작업을 해왔잖아요. 철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처음엔 차갑지만,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진다는 거예요. 녹이 슬면서 색깔도 변하고, 세월이 묻으면서 더 멋있어지죠. 그게 철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세종학당 현판청와대 명판
수천 개의 간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물은 무엇인가요?
세종학당재단 간판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전 세계 87개국, 252곳에서 한글을 가르치는데, 그 간판을 저희가 제작해서 보내고 있는데요. 어느 날 TV 다큐를 보는데, 아프리카 마을 한복판에 세종학당 간판이 걸려 있는 장면이 나온 거예요. 순간 소름이 돋았죠. 지금까지도 가장 뿌듯한 작업이에요. 또 하나는 청와대 명판이에요.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청와대입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친구 장난인 줄 알았어요. 믿기지 않아서 사업자등록증을 보내달라 했더니, 진짜 청와대였어요. 청와대 안에 놓을 명판을 의뢰해 주셔서 제작했어요. 뜻깊었죠.
‘한국’을 대표하는 한글, 그리고 ‘청와대’ 현판과 명판이라니, 너무 뜻깊었을 것 같아요. 문득 궁금해요. 간판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간판은 사람을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간판을 밖에서 봤을 때, ‘들어가기 싫다’ 싶은 공간이 있고, 반대로 ‘들어가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곳이 있잖아요. 본능적으로요. 간판은 그 마음을 바꿀 수 있어요. 간판은 곧 매장의 ‘첫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매장에서 플레져에게 간판 제작 문의를 해오잖아요. 대표님만의 작업 철학이 있나요?
점주분들이 간판에 대해 잘 모르실 때가 많거든요. 그냥 예뻐 보이는 걸로 주문하시는데, 매장과 전혀 안 어울릴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옷을 살 때 체형이나 분위기 상관없이 ‘이 옷 예쁘다!’ 하고 샀는데, 막상 입어보면 안 어울리는 것과 같아요. 그때 저는 말해줘야 해요. ‘사장님, 이건 매장이랑 안 어울립니다.’라고요.
계속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업을 요청할 땐 어떻게 해요?
그 작업은 하지 않아요(웃음). 플레져 포트폴리오에 자신 있게 남길 수 있는 작업만 하거든요.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간판, 세월이 흘러도 브랜드와 어울리는 간판, 그게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거예요. 간판 제작하면서 제일 힘든 게 점주님들 설득하는 거예요(웃음).
철로 그리는 플레져의 미래
철과 함께해 온 시간이 14년이 지났어요. ‘철’은 어떤 의미인가요?
행운이에요, 행운. 3억 빚을 지고 정말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는데, 철제 간판을 만들면서 지금까지 온 거니까요.
집요함과 끈기가 행운을 만든 것 같아요. 행운이 아무에게나 오는 건 아니잖아요.
타이밍도 중요한 것 같고, 준비가 돼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운이라는 게 한 번에 ‘빵’하고 찾아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마침 여자친구가 간판이 필요했고, 제가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다행히 그게 좋은 반응을 얻어서 성공을 이뤘으니까요. 물론 죽기 살기로 노력한 것도 있고요. 이 모든 게 도전 정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없어요. 늘 ‘망할 수도 있다’라는 걸 전제로 시도해요. ‘현재에 안주하면 무조건 망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마음이 가는 게 있으면 계속 도전해 왔고요.
LA 매장 간판 작업물
올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어요. 미국 지사를 열었는데 플레져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뭐예요?
해외 현지 문화와 공간 속에 한국적인 감성을 담은 간판을 선보이고 싶어요. 간판이 단순히 브랜드를 알리는 도구를 넘어, 도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요. 요즘 ‘K’만 붙으면 전 세계가 다 쳐다보잖아요. 음악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간판으로도 한국 감성을 표현할 수 있거든요. 저희가 열심히 하다 보면 ‘K’간판이 좋은 반응을 끌어낼 거라고 믿어요.
여동진
철제 간판 브랜드 플레져(PLZR)를 운영하고 있다. 수천개의 간판을 제작했으며, 현재 미국 지사를 설립해 한국 감성을 담은 철제 간판을 미국 시장에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