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기반 설치 미술가 연누리는 아트 디렉터와 상업 광고 미술 감독으로 활동하며 시각적 구조와 이미지의 언어를 다뤄왔다. 2022년부터 설치 미술가로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그는 기존의 스피커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는 방식으로, 기존과 전혀 다른 시각적·청각적 감각의 오브제로 전환한다.
연누리 작가는 일반적이지 않은 구조에 전기적·물리적으로 작동하는 작업이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관습을 넘어서는 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물성의 해체와 재조합을 반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구조 너머의 가능성을 드러내며 관객들의 감각적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기존의 관습을 넘어서는 시도

기존 스피커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고 있죠.
이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원래 물건 수집하는 걸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빈티지 스피커를 한창 모았던 시기가 있었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보통 음향 세팅이 좌우 스피커와 가운데 앰프가 있는 구조가 기본이더라고요.
문득 ‘왜 이 기준을 넘어서는 설정은 시도해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빈티지 스피커들을 전부 해체해 다시 조합하고, 전에는 듣지 못한 소리와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스피커를 해체해보기로 한 거예요?
네(웃음). 그리고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구하고 싶은 스피커가 있어서 음향 가게를 찾았는데,
주인 분이 “소리도 안 좋은 그런 옛날 스피커를 왜 여기서 찾냐”며
중고나라를 알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소리의 좋고 나쁨은 결국 취향의 영역인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쉽게 판단할까?’라는 질문이 처음 들었죠.
그래서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소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됐고,
그 시도가 지금의 작업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지금 작업의 철학을 만들어준 셈이네요.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얘기였지만, 그럼 셈이죠(웃음).
사람도 각자의 생각과 인간성이 모두 고유한데,
우리는 타인을 너무 쉽게 판단하잖아요.
‘이 사람은 이럴 거야, 나랑은 안 맞아’ 같은 식으로요.
그런데
판단하기 전에 조금 더 경험하고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요.
제 작품을 통해서도 기존의 관습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해체하고, 다시 낯설게 만드는 재미
스피커를 만든다는 건 구조도 중요하지만, ‘좋은 소리’를 담고 있느냐도 중요하잖아요. 소리와 디자인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고 작업하나요?
소리 자체도 물론 중요하죠. 스피커니까요. 다만 제가 하는 작업은 ‘음질이 좋은 스피커’를 만드는 건 아니에요.
새로운 소리를 내는 구조를 통해, 우리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경험하게 해주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어요.
스피커 작업에 쓰인 소재들을 보면 금속, 스테인리스, 아크릴 등 여러 재료가 눈에 띄어요. 소재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나요?
가공하기 쉬운 재료를 우선으로 골라요. 내부를 노출하는 구조다 보니, 부품을 어떻게 결합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가공이 어려운 소재를 쓰면 형태를 자유롭게 만들기 힘들어서 아크릴처럼 가공이 쉬운 재료를 선택했어요.
또 구조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물리적인 결합이 필요한데, 접착제는 한 번 붙이면 다시 떼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해체와 재조립이 가능한 *알루미늄 다보 같은 재료를 사용해요.
각각의 소재에 특별한 의미를 두기보다는, 작업의 결과와 과정에 맞춰 선택한 재료들이에요.
*알루미늄 다보 : 가구·인테리어·전시 구조물 등에서 부품이나 소재를 연결할 때 쓰는 알루미늄 재질의 연결 핀(결합 부품)
특별히 쇠구조물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 작업물이 눈에 띄는데요.
금속이나 쇳덩이 같은 소재가 가진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수집한 물건들을 분해해 보면, 멀쩡하게 남아 있는 건 결국 쇠나 금속밖에 없어요.
내구성이 강한 게 특징이죠.
플라스틱은 녹거나 부서지고, 고무는 삭아서 사라지고요.
그리고 기계를 분해해 보면 철 소재나 쇳덩이들이 여러 개 모여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뼈처럼 느껴져요.
구조물은 비율이 맞아야 하고, 금속이나 쇳덩이들이 여러 부품을 연결해 주는
브릿지 역할을 하죠.
금속 소재의 작품을 하나 보여줄 수 있나요?
이 작품은 히터를 활용해 만든 작업이에요. 고물상에서 우연히 봤는데 형태가 너무 이상해서 가져왔어요.
금속은 전도체라 에너지를 이동시키잖아요. 제가 쓰는 빈티지 앰프가 발열이 심한 편이라,
그 열을 식히는 매개체로 히터를 위에 올려놨어요.
사람들은 조형적으로 사용한 줄 알지만,
나름 최소한의 개념과 로직을 담은 작업이에요.
겉으로는 생뚱맞아 보여도, 그 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죠.
이 작품도 전구를 제외하면 전부 금속 소재처럼 보이는데요.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들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이 전구는 LED 기술 초창기에 만들어진 완제품이에요. 일반 알전구보다 약 10배 밝다고 하더라고요. 옆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들은 모두 방열판이에요. 광량이 강할수록 발열이 생기기 때문에, 열을 물리적으로 배출하기 위해 설계된 구조에요.
스피커 구조나 음향에 대한 전문 지식 없이, 멘땅에 헤딩하듯 작업을 시작했다고요. 시행착오를 겪으며 생긴 예측 불가능한 결과들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시행착오는 지금도 계속 겪고 있어요. 검정 스피커 조형물도 어제 완성한 작업인데, 부품은 새 거고 유닛은 옛날 거예요. 새 부품이면 당연히 잘 작동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이 작업 하나를 만들면서 미니 앰프가 네 대나 터졌거든요. 전압을 잘못 연결한 것도 아닌데요. 보통은 이런 상황을 불량으로 치부하고 다시 만들거나 해체하면 되는데, 저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물을 최종 작업물로 남겨둬요.
작동이 되지 않아도 하나의 작품으로 남겨둔다는 점이 인상 깊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작품의 완결’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작품을 하나의 인격체라고 생각해요. 사람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어딘가 결핍이 있고, 남들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안고 살잖아요. 작업물 안에 남아 있는 망가진 부분들도 그런 시각으로 바라봐요. 부품들도 각자의 수명이 있으니까 작동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잖아요. 그 모든 상태를 포함해 하나의 작업물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업을 계속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재미요(웃음). 작품을 완성하는 데 대단한 기술이나 복잡한 로직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중학생 정도의 과학 수준이면 충분해요. 플러스와 마이너스 전기, 배터리 전압 같은 기본만 알면
연결 자체는 할 수 있거든요.
다만 새로운 대상을 관찰하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 완전히 낯설게 만드는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거를 해체해 지금을 만들다
작가님 작업은 누군가의 레퍼런스를 인용한다기보다, 자기 안에 축적된 경험이 작동하는 느낌이 들어요. 작업의 감각을 형성한 가장 큰 영향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세요?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서울이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하게 잘게 쪼개져 있잖아요. 대표적인 곳이 을지로나 세운상가 쪽이고요. 그곳에 가면 정말 못 만드는 게 없어요. 기계가 망가지면 왜 망가졌는지 바로 설명해 주고, 교체하면 되는 부품을 찾아 실제로 고쳐 주기도 해요. 연결이 까다로운 부품이 있으면 “이게 왜 어려워?” 하면서 바로 해결해 주고, 구할 수 없는 부품은 직접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작업 안에 들어가 있는 셈이네요.
맞아요. 을지로를 베이스로 계속 실험해 왔고, 지금도 거의 매일 가요. 뭔가를 찾으러 간다기보다 관계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기계 수리를 맡기고, 비용도 깎지 않아요. 그분들이 있어야 제가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빈티지 스피커처럼 아날로그 기기를 선택하는 이유가 작업 방식과도 연결돼 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에게 아날로그 기기가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요? 빈티지 스피커를 모으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물건들이라는 점이에요. 과거의 기계들은 지금 다시 만들 수 없고, 실제로 복구해 보면 구조가 복잡하고 덩어리도 크죠. 뜯어보면 각 부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비교적 명확하게 보이고, 수리도 가능하죠. 시각적으로 보이고, 이해 가능한 구조 자체가 매력적인 요소이고, 해체하고 조합하는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에요.
디지털과 AI 환경이 일상이 된 지금, 작가님이 느끼는 ‘아날로그 물성’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아날로그가 더 미래 같다고 느껴요. 미래라는 건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예측만 가능하잖아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과거의 물건들도 그런 점에서는 하나의 미래처럼 느껴지고요. 또 지금의 기계들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물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게 중요해요.
관찰이 쌓여 하나의 세계가 될 때
요즘처럼 창작을 시도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은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이미 만들어진 누군가의 창작물 보다는,
주변에 존재하는 사소한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찾거나,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보면 좋겠어요.
거기서 각자의 답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작품 앞에서 관객이 가장 집중해서 느꼈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전시할 때도 텍스트는 최소한만 두는 편이에요. 제가 구구절절 설명해 버리면 사람들은 그 설명 안에서만 작품을 보게 되잖아요. 제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 생각을 하나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놓을 뿐이고, 어떤 해석을 할지는 각자가 자유롭게 느끼고 판단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작가로서의 지향점이 있나요?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재미없는 작업을 하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아요.
항상 새로운 것, 낯선 것들을 바라보고, 연결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수집기반 설치 미술가 연누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수집기반 설치 미술가로, 사물을 수집해 관찰하고, 새로운 용도와 조합을 찾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