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와 성북구, 두 곳에서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전에’를 운영하는 박정수 대표. 그에게 '철을 아이스크림으로 표현해 달라'는 낯선 미션을 요청했다. 철이라는 소재를 어떤 맛과 색으로 풀어냈을까. 박정수 대표의 ‘녹기전에’, 그리고 조금 특별한 쇠맛 아이스크림의 개발 이야기를 들어본다.

매일 새로운 맛을 만드는 사람
Q. ‘녹기전에’라는 이름이 인상적이에요. 아이스크림 가게에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가 있나요?
가게를 창업하게 된 계기와 맞물려 있는데요. 애당초 가게를 열게 된 계기가 ‘시간’에 대한 고민이었어요. 시간에서 파생되는 것들이 많잖아요. 죽음이나 탄생이 있을 수도 있고, 지금이라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모두 포함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오브제를 찾던 중 아이스크림을 떠올리게 됐어요. 대부분의 물건은 가만히 있는데 아이스크림은 조금씩 녹아가니까요.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맛있기도 하니 다루게 됐죠. 이름 역시 시간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였으면 해서 ‘녹는다’와 ‘전에’를 합쳐 ‘녹기전에’를 만들게 됐습니다.

Q. ‘녹기전에’에서 지금까지 약 400개의 메뉴를 선보였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는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와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원물이 아이스크림의 재료로 보였어요. 각각의 원물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데 2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재료들의 궁합을 보면서 서로 섞어보는 작업을 또 2년 정도 했고요.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지금은 아이스크림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료와 컬러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것들을 가지고 어떤 의미를 담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쇠맛 아이스크림 제작 과정
Q. 이번에는 철을 아이스크림으로 표현해달라는 다소 낯선 미션을 받으셨는데요. 처음 제안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어려운 미션이었죠. 고민하느라 막막하기도 했는데, 과정 자체는 너무 즐거웠어요. 매일 똑같은 제품을 반복해서 만드는 것보다 새로운 레시피를 시도하고 다루는 일이 더 재미 있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쇠맛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보자’는 미션도 오히려 더 재미있고 즐겁게 고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어려운 챌린지가 들어오는 게 제 성향에는 좀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웃음)

Q. 작업을 시작하기 전 대표님에게 ‘철’은 어떤 이미지였나요?
우선 세상에는 정말 많은 물질이 있잖아요. 그중 철은 뭐랄까요. 인류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물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역사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철을 사용하며 발전해왔고, 철을 이용하면서 얻은 효용이 굉장히 크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거든요. 인간에게 뼈라는 골격이 있듯이 사회의 인프라와 구조를 담당하는 소재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물질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Q. 철의 여러 특성 가운데 이번 아이스크림에서는 어떤 모습을 가장 표현하고 싶으셨나요?
철을 만드는 과정을 표현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철이 용광로에 들어가 아주 뜨거운 온도로 달궈지는 모습 같은 것이요. 철이 녹는 모습을 레드 계열의 비주얼로 가져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매장에서 사용하는 트레이가 스테인리스 소재거든요. 스테인리스 통에 이글거리는 레드 계열의 아이스크림을 담으면 철을 좀 더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Q. 최종적으로 ‘쇠맛 아이스크림’을 어떤 맛과 모습으로 완성하셨는지 제작 과정이 궁금합니다.
일단 아이스크림에서 ‘쇠맛’이 나면 안되겠더라고요. (웃음) 흔히 말하는 쇠맛은 숟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살짝 비릿한 맛에 가깝잖아요. 그걸 맛있다고 하기엔 어려우니, 맛을 살리면서도 녹고 있는 철의 이미지를 표현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어릴 때 불을 그릴 때 빨간색 하나로만 칠하지 않고, 등고선처럼 노란색과 주황색, 빨간색으로 층을 나눠 표현하잖아요. 이 세 가지 컬러라면 녹고 있는 철, 아주 뜨거운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각 컬러에는 라즈베리, 애플망고, 파파야를 사용해 상큼하고 깔끔한 맛을 구현했습니다.

Q. 실제 아이스크림에서도 녹아 있는 철과 이글거리는 불꽃의 이미지가 잘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 비주얼에 담고 싶었던 의미도 있을까요?
일상적인 재화를 만드는 회사들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그 재화들의 '소재'를 생산하는 회사는 일반인들에게 다소 멀게 느껴지잖아요. 그 모습을 직접 들여다볼 기회도 많이 없고요.
그런데 이번에 작업하면서 철이라는 소재와 그것이 다뤄지는 과정, 그리고 철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들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거대한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힘과,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에너지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아이스크림에도 그런 현대제철의 역할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Q. 철과 아이스크림은 언뜻 상당히 멀어 보이는 소재인데요. 직접 고민하고 만들어보면서 두 소재 사이에서 의외로 연결되는 지점도 발견하셨나요?
‘녹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아이스크림은 온도에 굉장히 민감한 디저트예요. 어느 정도의 온도에서 보관하는지, 제조할 때 몇 도에서 뽑히는지 같은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철에도 녹는점이 있고, 제철소에서 철을 다룰 때도 온도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두 소재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녹기전에는 독창적인 아이스크림 네이밍으로도 유명한데요. 이번 아이스크림을 위해 생각해두신 이름도 있을까요?
‘유STEEL 마이 No.1’입니다. (웃음) 가수 보아님의 ‘No.1’이라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창작자의 고민에 대하여
Q. 매번 새로운 맛을 개발하다 보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 같은데요. 맛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방법을 바꾸거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대표님만의 방식이 있을까요?
건축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건축으로 비유해볼게요. 건물을 보면 안에 콘크리트도 들어가고 철근도 들어가죠. 그런데 건물을 지을 때 들어가는 콘크리트엔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고, 철 역시 하나의 종류만 들어가는 건 아닐 거잖아요.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데 정말 다양한 재료가 정확한 비율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당류만 해도 포도당, 과당, 알룰로스 등 여러 재료가 있고, 같은 당이라도 무엇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아이스크림의 골조가 달라져요. 겨우 1g의 설탕에 따라 식감이 달라지기도 하고, 원하는 텍스처가 나오지 않기도 해요. 그래서 모든 제조 과정에는 수식과 계산이 필요합니다. 이런 분자 구조들을 매일 연구하면서 다양한 재료를 조합해 원하는 식감과 텍스처를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말씀을 듣고 보니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과정과 현대제철이 철을 만드는 과정에도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작은 오차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정을 정교하게 다듬어간다는 점에서요.
철과 아이스크림의 제조 과정이 실제로 꽤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철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하나의 새로운 공정을 개발하고 완성하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시행착오,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거든요. 제가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 겪는 과정과 많이 유사해 보였어요. 이렇게 공통점이 전혀 없을 것처럼 보였던 '철'과 '아이스크림'이 생각보다 많은 교집합을 갖고 있다는 걸 발견할 때 마다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이번 미션을 마치며
Q. 이번 프로젝트를 마친 소감이 궁금합니다.
일단 정말 재미있었어요. (웃음) 간만에 어려운 미션을 받아서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이번에는 제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소비재를 보여주는 작업이 아니라,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는 영역을 보여주기 위한 중간자의 역할을 한 거니까요. 신중하게 접근했고, 표현을 잘하기 위해 많이 애썼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Q. 오늘 철에 대한 대표님의 제법 진지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었는데요. 마지막으로 대표님께 현대제철은 어떤 의미인가요?
한마디로 하자면 현대제철은 ‘보이지 않는 기둥’ 같아요. 기둥이란 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존재니까요. 현대제철도 마찬가지 같아요. 수직 구조물 속의 철근, 자동차 강판 등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소중한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치고 있는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수 대표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전에’를 운영하며 매일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을 선보입니다. 아이스크림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 『좋은 기분』을 출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