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동안 한 분야를 지켜온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민음사 박지아 편집자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에 닿는다. 철처럼 단단하지만 때론 유연함을 갖춘 사랑. 그녀는 민음사 유튜브에서 애독한 『사랑의 기술』을 소개했고, 그 덕에 동료들에게 ‘사랑책 독파 마니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지아를 만나 그녀를 성장시킨 여러 순간을 들여다봤다.

때론 뜨거운 마음으로, 때론 차가운 머리로
Q.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박지아입니다. 2008년부터 다양한 회사를 거치며 인문, 경제경영,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편집 일을 해왔습니다.
Q. 편집자는 어떤 일을 하나요?
편집자의 일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희 친척들도 “그래서 네가 책을 쓰는 거야?” 이렇게 물어보실 때도 많아요. (웃음)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 위한 프로듀서나 감독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프로듀서처럼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투자, 예산, 인력 구성 등을 책임지고, 감독처럼 작품의 창작 방향과 표현, 편집을 지휘하는 일을 하죠.

해외 문학 편집자는 가장 먼저 어떤 책을 낼 지 기획해요. 주로 부커, 나오키, 노벨 등 다양한 시상식이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같은 굵직한 행사를 눈여겨보며 주목받는 작가를 살펴보죠. 그 중 한국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검토합니다. 작가와 계약을 하고 나면 번역가 섭외, 디자인 요청, 교정∙교열 등의 업무를 진행해요. 출시가 임박했을 땐 책의 소구포인트를 잡아 마케팅팀에 전달하고, 제작부에 출력을 의뢰하죠. 종이 질감, 무게, 컬러출력법 등 세세한 사항까지 결정한답니다. 책의 만듦새에 관한 모든 부분에 편집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 거예요.

Q. 편집자로서 책을 고를 때 애정과 냉정함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으시나요?
도서 갈래마다 선별의 기준이 다른 것 같아요. 자기계발이나 경제/경영 분야를 고를 땐 트렌드를 중시했어요. 한국인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며, 시대와 소통하려고 했죠. 문학은 이에 반해 추상적이어서, 우선 제 마음을 움직이는지를 봐요. 읽고 나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책이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세상을 너그럽게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인지도 기준 삼는 것 같아요.
이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책을 골랐음에도, 제 취향이 통용되는 것인지에 대해 항상 차가운 머리로 의심하는 편입니다. 너무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집단 지성으로 동료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꼭 거쳐요. 항상 매번 저를 의심하고 또 소통해야 하는 게 편집일인 것 같아요.
느슨함으로 단단하게 이겨내다
Q. 민음사 입사 초기 일본 문학을 맡게 되시면서 일어 자격증을 취득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진 않으셨나요?
민음사 입사 당시 일본어권 편집자가 공석이라, 많은 일서가 제 담당으로 떨어졌어요. 친숙한 언어가 아니다 보니 제 담당 책의 제목조차 말할 수 없었죠. 이 답답함과 괴로움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느슨하게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처음은 주말 딱 하루 친구와 함께 과외를 받는 걸로 시작했어요. 이렇게 느슨하게 유지하다가 시험을 앞둘 때만 집중해서 공부를 하니 직장생활과 병행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Q. 오랜 기간 업무를 하시면서 어려웠던 때가 있었나요?
국내물 출판 과정이 설득의 연속이라 어려웠던 것 같아요. 저자 입장에서 책은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출판사 입장에서 책은 수익을 내야 하는 상품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목차 구성, 제목, 디자인, 세세하게는 문장 속 단어 하나까지 이견이 생기곤 하죠.
이런 점 때문에 서른 살 무렵에는 이종 업계로의 이직을 고민했어요. 목공, 패브릭 디자인, 양재 등 제가 관심 있는 분야도 많았거든요. 전공의 길을 살려 작가가 될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고민 끝에 편집자의 일은 계속하되, 대신 제가 더 좋아하는 분야인 문학을 하기로 결론 내렸죠.
Q. 어떤 마음가짐으로 저 시기를 보내셨나요?
편집자의 장점에 집중했어요. 편집자는 직업 특성상 책을 통해 다양한 세계를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거든요. 또 업무의 90%를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어요. 그렇지만 정말 출근하기 싫은 날에는 케이팝을 엄청 들었어요. 그 시간을 ‘출근’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좋아하는 노래 듣는 시간’으로 초점을 바꾼 거죠. 그렇게 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회사 앞이더라고요.
소소한 행복을 착즙하는 데 관심이 많아, 취미도 여러 가지로 다양한데요. 핵심은 하고 싶을 때만 하고, 하기 싫을 때는 쿨하게 놓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바게뜨 자켓도 2년째 뜨고 있죠. 아마 올해도 완성을 하지 못할 것 같아요(웃음)
삶을 편집하는 사랑의 기술
Q. 민음사 유튜브 병렬독서 편에서 <사랑의 기술>을 소개해 주신 적이 있는데요. 요즘 육아를 하시면서 지아 편집자님이 느끼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사랑의 기술>에서 나온 이 말을 되게 좋아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이 세계를 사랑하고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굉장히 배타적인 사랑이 많잖아요. ‘나는 우리 아이만 사랑해’ ‘나는 너만 사랑해’ 그런데 사랑이 어떤 특정한 대상에 의해 형성된다는 건 착각이라고 해요. 사랑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해요. 그래서 아이를 사랑할 때도 이 아이를 통해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는 거죠.

책에 따르면,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아버지의 조건부적인 사랑이 있어야 아이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대요. 이 구절을 떠올리며 육아에 임하는 것 같아요. 무관심한 건 아닌지, 반대로 간섭하는 건 아닌지. 또 지금 혼내야 하는지, 안아줘야 하는지. 그 중간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요리도 자꾸 하던 대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레시피에서 많이 벗어나 있잖아요. 이처럼 사랑에 대해서도 레시피를 복기하듯이 이 책을 재독하게 되는 것 같아요.
Q. 앞선 <사랑 문학 토너먼트>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뽑아주셨어요.
위대한 개츠비를 뽑게 될 줄 정말 몰랐는데요. 개츠비가 진짜 상류 사회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데이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굉장히 노력했잖아요. 결국 데이지는 그럴만한 사랑을 받을 여자가 아니었고, 개츠비는 모든 게 허무해져 생을 마감하잖아요. 이런 내용이 가슴이 아파서 개츠비를 고르게 되었네요. 모든 걸 쏟아부은 사랑이랄까요.

Q. 후보에 없던 추천해 줄 책이 있나요?
<죽음이 너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갔다면>이라는 책이에요. 제가 작년에 기획했던 책으로, 20대의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쓴 에세이랍니다. 부모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식을 잃는 것이겠지요. 이 책의 소재가 두려워서 저희 팀 엄마들은 아예 읽지도 못했어요. 근데 저는 이상하게 그렇게 큰 상실과 고통을 겪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더 두려웠어요.
이 책을 편집하면서 몇 번이나 울었답니다. 작가는 죽음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아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오히려 잊지 않고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죽음을 대처하거든요. 우리는 더더욱, 어떤 일이 있어도, 그래서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책 < 죽음이 너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갔다면> p.145
유연함이 만드는 단단함
Q. 지아님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무엇인 것 같나요?
친구들이 종종 저를 ‘중용의 신’이라고 놀리는데요.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무엇이든 일단 해보는 걸 좋아하는데 아주 지독하게 하지는 못해요. 과하게 가기 전에 브레이크를 잘 밟는 것 같아요. 때론 어느 한 곳에 너무 힘주느라 다른 곳에 에너지를 써야 할 때 못쓰는 경우도 있잖아요. 중용을 지키면서 사랑도, 육아도, 일도 취미도 적당히 즐기고 삶의 중심을 잘 잡아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Q. 여러 역할을 오가면서도 ‘박지아다움’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삶의 태도가 궁금해요. 앞선 중용과 맞닿아 있을까요?
중용과 함께 유연함도 중요한 것 같아요. 시대가 계속 변하고 저도 살면서 요구되는 역할이 바뀌거든요. 그때마다 물결을 잘 탔던 것 같아요. 인공지능이 업무 방식을 바꿔도 적응하고, 아내로 적응하고, 엄마로 적응하면서 변화에 맞춰가는 거죠. 어떤 물결을 타든 간에,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직감을 따랐던 것 같아요. 나를 더 잘 알고 싶다면 일단 무엇이든 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Q. 유연하면서도 중심은 잘 지키는. 어찌 보면 철의 속성과도 굉장히 비슷하네요.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 철은 단순히 단단하기만 한 물질은 아니더라고요. 열을 가하면 모양을 바꿀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열과 전기를 전달하기도 하고, 버려진 철도 다시 녹여 새로운 물건으로 태어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철이 오히려 단단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른 것과 연결되고, 다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불안함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결혼을 못 하면 어쩌지? 자식을 갖지 못하면 어쩌지? 등등 각자의 고민과 불안이 있을 거라 생각돼요. 저도 제 안의 불안을 많이 느끼는데요. 그럴 때마다 인류의 긴 역사를 상상하곤 해요. 현대인들의 복잡함과 바쁨이 본능을 거스른다는 감각이 들죠. 옛날이었다면 그저 살아있음에,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느꼈겠죠. 큰 의미에서 인간은 하루하루 삶을 잘 즐기다 가면 되는 것 같아요. 어찌 보면 행복은 철이랑 비슷한 것 같네요. 화려하게 눈에 띄진 않더라도 일상 속 곳곳에 숨어있으니까요.

박지아 편집자 (민음사)
인문, 경제·경영,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쳐 현재 민음사에서 해외문학을 편집하고 있다. 소소한 행복을 착즙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취미를 일삼으며 삶을 부지런히 즐기는 중이다. 좋은 책을 통해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 좋은 이야기를 건네는 일을 좋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