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USTAINABILITY+ 5 min read

철(鐵), 시간을 담는 금속

2025.11.24

스틸이 만들어온 기계식 시계의 역사와 존재 가치

인간이 금속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과 의미는 단순한 물질의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금속은 인류 문명의 축이고, 기술적 진보의 표상이며, 가장 오래 지속되는 형태로서의 기록이다. 그중에서도 금속 공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기계식 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표시하는 도구를 넘어, 인류의 역사를 앞당기고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준 물건이다. 금속은 시간을 견디고, 시간을 담아내, 시간을 형태로 만들어왔다. 

 

이를 제작한 다양한 물질 중 철을 기반으로 탄생한 현대 기술 문명의 상징 스테인레스 스틸(Stainless Steel, 이하 스틸로 표기)은 오랜 역사의 아날로그 시계에 새로운 가치 체계를 부여한 결정적 소재 중 하나다.🔩 20세기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른 기술적 요구, 환경과 문화, 그리고 인간의 심리까지 모두 뒤섞여 100년의 시간 동안 이뤄진 시계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920년대 롤렉스 광고

1926년 롤렉스 오이스터 워치

귀금속이 시계의 중심이었던 1910년대, 산업용 합금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스테인리스스틸이 탄생하며 1920년대 손목 시계에도 이를 활용한 시계들이 등장한다.⌚ 1926년 방수 성능을 높인 롤렉스의 오이스터, 1930년 항자성*을 강조한 티쏘 안티마그네틱 등 스틸은 기존 제조 기술의 한계와 성능을 뛰어넘기 위해 도입되었다.

 

당시 시계의 외장은 대부분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이나 브라스** 기반 도금에 의존했는데, 이들은 일상적인 생활이나 충격에서도 쉽게 마모되고 부식되어, 내구성이 중요한 환경이나 외부 활동에 적합한 재료들은 아니었다. 반면 스테인리스스틸은 표면에 산화피막을 형성해 탁월한 부식 저항성***을 지녔고, 니켈을 함유해 내구성과 강도를 극적으로 끌어올린 합금이었다. 덕분에 당시로서는 꽤 큰 문제가 뒤따랐는데 이 합금이 지나치게 단단해 당시 기계 가공 기술로는 시계의 케이스를 제작하는 것이 큰 난관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도 크기가 작고 복잡한 형상이 주를 이루는 무브먼트 소재****로 스틸을 사용하지 않는 큰 이유다. 

 

*항자성 : 자기장(자석의 힘) 속에서도 자성을 거의 띠지 않아서, 자석에 의해 시간이 틀어지지 않게 막아주는 성질.
**브라스 : 구리와 아연을 섞어 만든 노란빛 금속으로, 값은 싸고 가공이 쉬워서 예전 시계 외장이나 각종 금속 제품에 많이 쓰인다.
***부식 저항성 : 녹슬거나 산(땀, 바닷물 등)에 의해 손상되는 걸 얼마나 잘 버티는지를 나타내는 성질.
****무브먼트 소재 : 시계 안에서 시간을 실제로 맞추고 움직여 주는 ‘엔진(무브먼트)’을 만들 때 사용하는 금속이나 재료.

 

1940년대 해밀턴 군용 시계

1940년대 해밀턴이 미군에 납품한 군용 시계

라코 계측 시계를 착용한 폭격기 파일럿

라코가 제작한 계측 시계 시계를 차고 있는 폭격기 파일럿

그리고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이 발생한 1940년대에는 아이러니하게 군용 시계의 개발로 시계의 내구성이 높아지고, 효율적인 설계와 대량 생산 기술이 크게 발달한다. 손목 시계에 군용 규격, 즉 밀-스펙 기준이 적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전장이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생존과 전술에 직결된 계기 장비의 소재로서 스틸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유일한 해결책으로 툴 워치*를 만드는데 즉각적인 기여를 했다. 

*툴 워치 : 파일럿, 다이버, 군인처럼 특정 직업·상황에서 ‘도구’로 쓰기 위해 만든 실용 중심의 시계.

 

1953년 탄생한 롤렉스 최초의 서브마리너

1957년 롤렉스 서브마리너 광고

시간이 흘러 1950년대 스틸은 시계 산업에서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한다.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즈, 롤렉스의 서브마리너 등 이때 탄생한 현대적 기준의 다이버 워치*는 스틸이 단순히 내구성이 좋은 금속일 뿐만 아니라, 시계 구조의 근간이자 기능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당시 새롭게 요구되던 기술은 강력한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내수압 구조, 가혹한 염수 환경**에서의 내식성***은 물론 심해의 복합 환경 대응 능력이었다. 

 

*다이버 워치 : 물속·심해에서 잠수할 때 쓸 수 있도록 방수, 내수압, 시인성 등을 강화한 전문 잠수용 시계.

**염수 환경 : 바닷물처럼 소금이 많이 녹아 있는 물이나 그런 공기/환경을 통칭.

***내식성 : 땀, 바닷물, 공기 중 습기 등 화학적·환경적 요소에 의해 녹슬거나 상하지 않고 버티는 능력.

 

나사의 테스트를 합격한 증서와 스피드마스터

나사의 미션 수행용 시계 테스트

우주선에서 스피드마스터를 착용하고 있는 버즈 올드린

게다가 같은 시대 제트 엔진의 상용화로 인한 항공기의 급격한 발전은 시계 산업에 또 다른 요구 조건을 던졌다. 비행 고도에 따라 급격히 변하는 기압과 온도, 비행 중 전해지는 지속적인 충격과 진동, 계기에서 발생하는 자성*이라는 허들이 바로 그것이다. 스틸 케이스는 이렇게 해양과 항공이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모두 동일한 해법을 제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요소들이 지금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스포츠 워치의 핵심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제 스틸은 단순히 유행하거나 실험적인 재료가 아닌 인류의 확장된 물리 환경에 대응하는 기술적 솔루션이었으며, 이후 시계 산업이 각 분야에서 ‘전문 장르’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 이때 등장한 많은 시계들이 지금까지도 해당 분야의 정체성과 규범을 형성한 경우가 많고, 이를 각 브랜드는 전문성을 부여하는 이름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최초로 달에 간 계측 시계 일명 문워치라 불리는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프로페셔널, 민간 항공 파일럿의 필요성으로 만들어진 듀얼타임 항공 시계 롤렉스 GMT-마스터의 탄생이 이때다. 

*자성 : 물체가 자석에 끌리거나 스스로 자석 같은 성질을 띠는 정도.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엑스트라-씬 점보 오리지날 모델

시계 케이스 구조도

브레이슬릿 구조도

그리고 1960년대 후반, 일본의 세이코가 전지로 구동하는 쿼츠 무브먼트를 상용화하며 스위스의 전통적인 시계 산업은 큰 위기를 맞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1970년대는 스틸이 기능보다는 시계의 ‘외형적 미학’을 결정하는 시대로 변화한다.💎

 

전설적인 시계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는 오데마 피게의 요청을 받아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을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 일체형 디자인과 파격적인 팔각형 베젤**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최근 전례 없이 크게 유행한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로열 오크다. 기능 중심 도구로 사용되던 스틸을 처음으로 고급 모델에 적용했고, 단순히 새로운 디자인일 뿐만 아니라 고도의 금속 가공 기술과 정밀성이 뒷받침되어야 제조가 가능한 구조 때문에 ‘럭셔리 스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제조의 어려움으로 인해 금으로 만든 시계보다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브레이슬릿 : 금속 링크를 연결해 만든 시계줄로, 케이스와 일체형 디자인의 핵심이 되는 금속 밴드.
**베젤 : 시계 유리(크리스털)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테두리 금속 부분. 디자인과 성능(방수·회전 기능 등) 모두에 중요한 요소.

 

실제로 로열 오크가 최초의 일체형 브레이슬릿은 아니었지만, 외장만 무려 154개의 파트로 이루어졌고 그중 34개는 크기와 모양이 달라 압도적으로 복잡했던 건 사실이다. 이들이 모두 미세 공차* 안에서 제작되어야 브레이슬릿 관절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베젤, 미들케이스, 러그**, 브레이슬릿까지 이어지는 구조와 표면 마감이 하나의 흐름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이 과정을 스틸의 높은 경도***와 인장강도**** 속에서 수행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1970년대에 탄생한 역사적인 디자인들은 제조 기술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격찬할 만한 사건이다. 

동시에 같은 시대에 연달아 등장한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 바쉐론 콘스탄틴의 222 등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높은 인기를 얻어 하이엔드 브랜드를 대표하는 핵심 아이콘으로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공차 : 부품을 제조할 때 허용되는 미세한 오차 범위. 이 범위 안에서 만들어져야 모든 부품이 정확히 맞물려 부드럽게 움직임.
**러그 : 시계 케이스에서 양쪽으로 뻗어나와 스트랩이나 브레이슬릿을 연결하는 다리 같은 구조.
***경도 : 금속 표면이 얼마나 단단해서 긁힘이나 찍힘을 버티는지를 나타내는 수치.
****인장강도 : 금속을 양쪽으로 잡아당겼을 때 끊어지지 않고 버티는 힘. 구조적 안정성과 내구성을 좌우함. 

 

최고 수준의 미러 폴리싱 기법인 자라츠 폴리싱 장면

그랜드세이코 케이스. 자라츠 폴리싱으로 거울처럼 반짝이는 면과 새틴 브러싱으로 결을 살린 부분을 혼용했다

그리고 여기서 지금까지도 시계의 등급을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디테일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바로 외장 피니싱*의 품질이다. 표면을 일정한 방향으로 정밀하게 연마해 금속 특유의 결을 만들어내는 브러싱, 다단계 연마를 거쳐 거울처럼 반짝이는 깊은 반사면을 만드는 미러 폴리싱, 매트하거나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균일한 알갱이를 지속적인 압력으로 유지해야 하는 비드블라스트 등 표면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장인의 섬세한 작업이 케이스에도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외장 피니싱 : 케이스와 브레이슬릿 표면을 갈고 닦아 결·광택·질감을 만드는 모든 마감 기법(브러싱, 폴리싱, 비드블라스트 등).

 

이런 다양한 피니싱 기법을 거치고 나면 단일 스틸 소재의 케이스일지라도 빛의 반사에 따른 마법 같은 변화를 즐길 수 있다. 제조 기술이 고도화된 지금은 기계나 자동화 공정으로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가능하다. 단,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나올 수 있는 높은 디테일이나, 각 기법이 만나는 경계선, 복잡한 형상의 모서리 부분 처리 등 아직 사람의 손으로만 이룩할 수 있는 경지가 많다.🫴 그리고 무브먼트를 포함해 이 모든 피니싱이 최고 수준으로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그 시계를 하이엔드라 부른다.

 

파텍 필립 노틸러스 5711 그린 다이얼 버전. 발매 후 프리미엄이 정가의 10배까지 발생한 인기 모델. 현재 생산이 종료되어 더욱 희귀

이처럼 스테인리스스틸은 지난 100년 동안 시계 산업이 발전해 온 모든 과정의 중심에 있었다. 시계가 단순한 도구와 장식품에서 실용 기계로, 그리고 전문 계측기에서 조형 예술품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함께했다. 이제 손목 위의 스틸 시계는 시간을 보여주는 도구이기 전에, 시간을 견디고 시간을 보호하며 시간을 구조화하는 하나의 금속 구조물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아날로그 메탈 시계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특히 스틸은 여전히 시간을 담는 가장 안정적인 재료이며, 이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인간적인 기술이기 때문이다.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퍼페추얼 캘린더. 아름답게 마감한 스틸 케이스 속에 시간과 달력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아낸 기계식 시계의 정수

 

김도우 시계 전문 웹진 클로카 대표

한국을 대표하는 시계 칼럼니스트들과 함께 창간한 시계 전문 웹진 <클로카>의 대표. 오랜 시계 애호가이자 컬렉터로 시계 커뮤니티, 브랜드, 매체 편집장까지 모두 경험한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인스타그램 : @dowoo1950

 

[moment]는 '철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현대제철의 대내외 공식 플랫폼입니다.
특히, 철강산업의 트렌드와 함께 현대제철의 기술력, 더 나아가 '철과 인간의 삶'을 연결하는 다채로운 콘텐츠를 기획·연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moment 편집인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