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길로 접어드는 초입에는 오래된 숙명 하나가 놓여 있다. 그것의 이름은 '대중의 감각을 깨우는 일'이다. 그 숙명을 받아들인 창작자들은 온 평생 자신이 다뤄야 할 감각을 골똘히 연구하기 시작한다. 화가는 시각을, 음악가는 청각을, 요리사는 미각을, 그리고 조각가는 손끝의 촉각을. 그들의 탐구 대상이 되는 감각은 보통 한 가지 종류로 국한된다.
그런데 여기,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다루는 창작자가 있다. 마포구 망원동 398-15번지. 고개 숙일 일이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반 지층. <해수향당>이라는 글씨가 간신히 적혀 있는 반 뼘 남짓한 간판이 쑥스러운 듯 방문객을 맞이하는 작은 공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간판과 똑 닮은 몸짓으로 담당자를 반겨준 건 다름 아닌 '그림을 그리는 조향사' 혹은 '향을 빚는 화가'. 오인석 대표였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오후, '현대제철을 향으로 표현해 줄 수 있겠느냐'는 난데없는 요청을 받은 그는 잠깐 당황했고 오래 골똘했다. 하지만 마지막엔 경쾌한 미소를 건네주었다. 그 미소의 형태가 흐릿해질 즈음, 낯선 메일 주소로부터 알림이 왔다. 어느덧 골목골목 가을의 미풍이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공감각적 공간 <해수향당>의 오인석 조향사
Q.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요청드렸던 '현대제철의 향'을 완성해 주셨군요.
제가 연락을 안 드릴 줄 아셨나 보죠? (웃음) 네, 완성했습니다.
Q. 우선 대표님을 처음 뵙는 미디어룸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해수향당>이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오인석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향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분명 저는 라멘집 오너를 꿈꾸며 5년 넘게 주방 일을 보조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이곳이었네요.

Q. 라멘집 오너를 꿈꾸셨다고 하셨지만,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웃음) 사실 저는 스스로를 <마린블루스 키즈>로 칭하는, 이른바 캐릭터 디자인 꿈나무였습니다. 학창 시절엔 웹툰 『마린블루스』의 정철연 디자이너님을 보면서 "나도 꼭 저렇게 되어야겠다!"고 매일 다짐했을 정도였죠. 진로를 시각디자인과로 정한 것도 정철연 디자이너님과 같은 전공을 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Q. 그렇게 그림을 사랑하셨던 분이 어쩌다 '향'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나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그림을 사랑했기 때문'인데요. 사실 저는 시각디자인과가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컴퓨터 다루는 시간이 월등히 많은 전공인 줄 몰랐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대학에 입학해서 쥐고 싶은 연필 대신 마우스만 잡게 된 거죠. 그다음은 흔하게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입니다. 학부생 시절 내내 그림에 대한 갈증이 점점 쌓여갔고, ‘졸업 후에 후폭풍이 불었다 –‘ 라는 이야기요. 말 그대로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림만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가 그림을 그릴 때 생겼던 루틴이 바로 인센스 스틱이었는데요. 인센스 특유의 향을 맡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맡고 싶은 향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분명 처음엔 좋았던 향인데, 맡다 보니 제 취향과 조금씩 어긋난 부분이 발견되는 거죠. 결국 "내가 맡고 싶은 향을 직접 만들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향에 발을 들였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Q. 그림과 향, 그러니까 '시각'과 '후각' 두 감각을 동시에 다루면서 겪는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솔직히 말하면 이때까지 제 스스로를 '두 개의 감각을 다루는 사람'으로 여겨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림 작업과 조향 작업을 순차적으로 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요즘 기사로 많이 보이는 현대제철의 철스크랩을 예로 들자면, 우선 철스크랩들을 먼저 모으는 작업을 하고, 그 작업을 마친 뒤에 선별 작업을 할 테고, 선별을 마치고 나서야 전기로에 녹이는 작업을 진할 거잖아요. 저 역시 그림을 먼저 그리고 나서 향을 떠올리거나, 향을 먼저 만들고 나서 그 향과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두 감각을 말 그대로 '동시에' 다루는 경우는 딱히 없습니다.
현대제철의 향을 그리다
Q. 처음 '현대제철의 향'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라 놀랐습니다. 미션 자체의 의외성보다는 "현대제철이 이런 것도 해?"라는 데에서 오는 놀라움이 더 컸죠. 죄송하지만 제 머릿속의 현대제철은 뚝딱뚝딱 철을 만드는, 뭐랄까요 기업이라기보다는 '산업' 그 자체의 와일드한 이미지가 컸거든요. 아,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아무튼 처음엔 놀랐고, 그 다음엔 솔직히 쉬운 미션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더군요. 대화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었고, 금방 만들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Q. 금방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것 치고는, 완성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 (웃음)
제가 뭘 잘 몰랐던 거죠. (웃음) '그래도 많고 많은 조향사 중에 나를 콕 집어 찾아와 주셨으니, 제대로 공부하고 작업을 진행하자' 라는 사명감으로 현대제철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요. 웬걸, 현대제철도 '시각디자인과'였던 겁니다. 사실 그동안 현대제철 하면 단순히 철근 만들고 H빔 만드는, 이른바 '공사장에서 만날 수 있는 기업'으로 인식해 왔었거든요. 그런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제 일상과 너무 가까운 곳에서 동행하고 있는 기업이란 걸 깨닫고 놀랐습니다.
당장 오늘 인터뷰 직전에 사용했던 AI만 해도 이 AI를 돌아가게 만드는 생태계 속에 현대제철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전엔 전혀 알지 못했었거든요. 작업실로 이동할 때 쓰는 제 자동차 부품들 역시 대부분 현대제철이 만든 소재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나 미래 에너지를 운송하는 선박에도 현대제철의 특수 철강재가 쓰인다는 사실 같은 것들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Q. 만들어 주신 향에는 새롭게 깨달은 현대제철의 이미지가 담겨 있겠군요.
맞습니다. 향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해드릴게요. 우선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최대한 지양했습니다. 무겁고, 단단하고, 묵직하고, 스모키한 이미지 같은 건 아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작업을 시작했죠. 그것들이 최근 현대제철의 비전이나 가치, 행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향의 베이스는 워터리 모스로, 맑은 날의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라고 상상해 주시면 됩니다. 산뜻하고 가벼운 그리너리 워터리 향을 기준으로 삼고 그 위에 허브 계열의 쌉쌀함과 상큼함, 머스크 등으로 레이어를 쌓아갔죠.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향의 이미지는 '우리의 일상에서 은은한 존재감을 보이는, 친근하면서 맑은 느낌'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존재감이 흐릿한가 싶다가도 자꾸 눈에 밟히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심지어 알고 보니 남모르게 저를 챙겨주고 있던 그런 사람. 제가 공부한 현대제철의 이미지가 딱 그랬습니다.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우리의 삶 곳곳에서 일상을 지탱해 주고 있는 기업 말이죠.

Q. 철은 단단하고 오래 남지만, 향은 형태가 없고 금세 사라집니다.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개념을 연결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저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향이 오래 남고, 철이 금세 사라진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향이라는 건 공기 중에 흩뿌리고 나면 금세 휘발되어 물성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큼은 향보다 오래 생명력을 유지하는 존재가 드물지 않을까 싶어요. 어린 시절 문방구 냄새나 교실 마루 냄새, 할머니 품 냄새 같은 것들을 '금세 사라진다'고 표현하긴 어렵잖아요.
반대로 현대제철의 제품들은 물성은 오래 남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금방 잊힌다는 점이 살짝 안타깝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이 건물도 철근이 지탱하고 있을 것이고, 자동차나 AI, 선박, 발전소 등 수많은 분야에서 철이 활용되고 있을 터인데, '철' 자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서요. 저라도 오래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웃음)
『LEET'S,TEEL』 네이밍의 의미와 해석
Q. 향의 이름도 지어주셨어요. 『LEET'S,TEEL』이라는 네이밍, 어떤 의미일까요?
이건 정말 우연의 산물인데요. 급한 작업을 마치고 나서 '자, 이제 현대제철 해 보자!' 하고 속으로 혼잣말을 했는데, 거기서 “렛츠 스틸” 이라는 문구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노트 위에 영어로 Let’s, steel이라는 단어를 끄적이고 나니 회문으로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아, 혹시 몰라 첨언하자면 회문이란 '토마토'나 '소주만병만주소'처럼 거꾸로 적어도 같은 철자인 구조를 의미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문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was it a cat i saw?"라는 문장으로... 그만하겠습니다. 회문 구조까지 생각해보고 나니 뭔가 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앰비그램’까지 고안해 내게 된 거죠. 앰비그램도 소설 <천사와 악마> 속에서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개념으로, 180도 돌려도 똑같이 읽히는... 네, 그런 겁니다.

Q. 거꾸로 읽어도, 180도 뒤집어도 같은 의미를 담는 '회문'과 '앰비그램'에서 현대제철의 모습도 발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단순 재미를 넘어, 의미까지 현대제철과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앰비그램이나 회문 구조의 단어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리 돌리고 저리 뒤집어도 그 모양이나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현대제철이 만드는 철 역시 자동차의 부품이 되기도 하고 건축물 속 구조물이 되기도 하며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만, ‘사람들의 삶을 지탱한다’는 본질적인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발견했어요. 한편으론 철스크랩 공정 속에 담긴 '끝이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는 순환성' 역시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회문의 구조와 닮아있다고 느꼈고요.
Q. 꿈보다 해몽 같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해석이네요. 마지막으로 이 향을 처음 맡은 사람이 떠올렸으면 하는 풍경이나 장소가 있을까요?
저는 이 향을 맡으면서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장소'를 떠올립니다. 조금 추상적이고 현학적이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향을 조향하면서 '미래'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었거든요. 현재와 미래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현대제철이 훗날 우리에게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눈을 감고 향을 맡으며 각자만의 풍경을 상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인석 대표
공감각적 공간, <해수향당>에서 그림을 그리고 향을 빚어냅니다. 바다 내음을 특히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