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ystal_Palace_interior
‘동화처럼 믿을 수 없이 영광스러운 광경’ (영국 빅토리아 여왕), ‘불가능해 보였던 건축을 실현해 낸 과학 발전을 자축할 시간’(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19세기 중반 런던과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뒤로도 이곳만큼 주목을 끈 건물은 없을 것이다.’ (미국 공학자 헨리 페트로스키) 그들의 찬사는 모두 하나의 건축물을 향한다. 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최초의 박람회 런던 엑스포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은 세계 최대 크기의 다이아몬드도, 망원경이나 팩스기 같은 최신 발명품도 아니었다. 바로 박람회가 열린 ‘장소' 자체였다. 정원사 출신의 기술자였던 조셉 팩스턴은 당시 세계 최고 산업 국가인 영국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유리와 철만으로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건축물을 지었다. 4천 5백t의 주철과 30만 장의 유리로 길이 최대 563m, 폭은 124m에 달하는 공간을 완성했고, 목재와 석재, 콘크리트를 쌓고 채우는 건축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에 완전히 마음을 뺏겼다. 그들은 이 장소에 수정궁(Crystal Palace)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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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궁의 메인 재료가 되며 건축재료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른 철은 이후 유리와 함께 도시의 풍경을 완전히 바꿨다. 오늘날 도시의 마천루를 이루는 빌딩과 구조물에서 철이 쓰이지 않은 곳은 없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카페와 오피스 인테리어, 집의 수납 가구와 반려동물을 위한 그릇까지 매일의 일상에서도 철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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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디자인의 거장 디터 람스(Dieter Rams)가 디자인한 비초에의 선반 시스템을 이루는 재료는 철 하나다. 이 가구가 “Less but better”라는 그의 간결한 디자인 언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된 데에는 가벼운 무게로도 튼튼하게 하중을 지지하는 내구성, 얇은 두께도 정확하게 자르고 구부리는 가공성, 조립으로 단단하게 구축하는 철을 소재로 택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가구 브랜드 스트링 시스템 또한 철을 메인 재료로 모듈 가구의 미학을 보여준다.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유닛을 원하는 개수대로 조합한 가구는 거실이나 서재는 물론 복도와 욕실, 침실과 오피스까지 장소를 막론하고 균일한 미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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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비초에와 스트링이 있다면, 한국에는 레어로우가 있다. 철제 가구 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탄생한 레어로우는 가구뿐만 아니라 트롤리와 거울 같은 아이템까지 확장하며 리빙 브랜드로 도약 중이다. 견고한 물성과 가공성에 더해 무엇을 입히는지에 따라 형형색색 다채롭게 변모하는 마감재로서의 장점을 살려 제품군을 넓혔고, 단순히 공간을 채우는 가구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디자인 흐름을 형성하며 ‘쇠테리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지난해에는 1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디자인 스튜디오 열 곳과 협업한 컬렉션을 선보이며 가구 애호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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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가 되는 집 인테리어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USM의 할러 시스템도 철제 가구 하면 빼놓지 말아야 할 제품이다. USM은 아이코닉한 동그란 볼이 달린 철제 튜브 구조에 취향대로 색상 패널을 조합하는 시스템으로 2001년 일찌감치 뉴욕 현대미술관 MoMA의 디자인 영구 소장 컬렉션으로 채택됐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때 퍼렐 윌리엄스의 스킨케어 브랜드 휴먼레이스와의 협업으로 그리너리한 욕실을 선보이며 여전한 화제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철은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 낮은 온도에서 서서히 굳으며 형태를 갖춘다. 팽창과 수축, 액체와 고체를 오가는 과정을 거치며 제 모습을 찾아가는 이 소재는 차가운 모습인 동시에 주변에 부드럽게 녹아들고, 단단하면서도 유연하다. 이러한 상반된 모습들이 조우하며 공간 안에서 일종의 균형감을 만들어 낸다. 철이 공간의 주요 소재로 부상한 데에는 앞서 소개한 무수한 장점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체 불가능한 면모는 그 균형감을 유지하며 내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있다. 무언가를 덧입히더라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 자연에서 난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며, 튀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인상을 남기는 소재. 이제 철은 일상에서 Less but better의 태도를 실천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정경화
건축가는 포기했지만 건축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대신 쓰기를 택했다. 경력은 5년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10년을 바라보고 있는 공간&리빙 에디터. @_hwa_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