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튀는 대장간에서 전통과 현대가 손을 잡았다. 조혁빈 대표는 40년 전통의 대장장이와 함께 금속 공예 리빙 제품 브랜드 ‘자이너(ZAINER)’를 만들었다. 그는 대장간 기술을 담은 제품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접목해 장인들의 생태계를 확장해왔다.
조 대표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전하기 위해 브랜드를 ‘모루(MORU)’로 리뉴얼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2024년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은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지않아 한국 대장간 기술이 세계 무대에서 빛을 발할 것이라는 기대가 자연스레 커진다.
사라져가는 대장간을 브랜드로 살려내다
'금속 공예'와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다고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해서 금속 공예와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졸업할 때가 되니 작업 현장에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군대 다녀온 뒤 바로 대장간을 찾아갔죠.
대장장이가 되겠다는 마음으로요?
처음엔 대장장이 기술을 기반으로 금속 공예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40년 전통의 ‘숲속의 대장간’을 찾아가 ‘여기서 기술을 배울 수 있나요?’ 하고 물었죠. 마침, 그곳에 계신 대장장이 장인 이광원 스승님(이하 스승님)을 만나서 도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도제 교육이란, 철의 가공 공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배우고 대장장이 기술을 직접 시연해보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곳을 찾아간 이유가 있어요?
스승님은 농기구 같은 공구뿐 아니라 금속 공예 예술 작품도 같이 만드시더라고요. ‘여기서라면 더 다양한 걸 배울 수 있겠다.’싶었어요. 2년 동안 밤낮 없이 열심히 배웠습니다(웃음).
브랜드 자이너(ZAINER) 제품 패키지
금속 공예 작가가 되고 싶다던 청년이 브랜드 '자이너'를 만들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대장간에서 일 해보니, ‘한국에는 대장장이가 정말 없구나, 점점 사라지고 있구나’하는 걸 느꼈어요. ‘왜 사라질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고민 끝에 찾은 첫 번째 이유는 ‘인식’의 문제였죠. 스승님은 대장장이로서 자부심이 크시거든요. 철기 문화를 부흥시키겠다는 신념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어요. 일부 사람들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는 편견을 갖고 있더라고요. 실제로 ‘대장장이’는 공예가나 크리에이터가 아닌 단조원, 즉 철 가공자로 분류되거든요. 전통 금속 공예가나 크리에이터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어요.💬
사명감이 생겼네요.
맞아요(웃음). 대장간 제품의 가치도 올리고 싶었어요. 전통 가치와 뛰어난 기술력이 담긴 핸드메이드 제품이 신문지에 대충 싸여 나가는 게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전통 금속 공예 문화와 관련된 문제를 풀어가는 사회적 기업이자 브랜드, ‘자이너’를 만들었어요.
대장간에서 배운 기술, 디자인에 녹이다
대령숙수 버선코 식칼 패키지
제품 디자인은 다 혼자 했어요?
대장간도 직접 다녔고요. 제품 스토리부터 패키지 디자인까지 전부 제가 했어요. 누군가는 업체에 맡겼을 거라 생각하시더라고요(웃음). 전부 제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에요. 정말 힘들었어요.
대장간에서 받은 도제 교육이 브랜드와 제품을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대장간 경험이 없었다면 브랜드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전통 금속 공예를 현대적으로 풀어낼 생각조차 못 했을 테니까요. 디자인과 공예를 배우며 제작 과정에서의 한계와 가능성을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죠.
대장간에서의 경험으로 디자인 문제를 해결했던 사례도 말해주세요.
대장간 단조 식칼은 망치로 두들겨 형태를 잡는데, 제품을 균일하게 만들기가 어려워요. 저는 가공 순서와 재료 배합을 조금만 바꾸면 가능하다는 걸 알았어요. 작업 과정에서 *중력 주조 기반 가공 기술까지 직접 개발했고요. 대장간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중력 주조 기반 가공 기술 : 중력으로 만든 금속 형상을 후가공하여 완성품으로 만드는 제조 공정
제품을 만들 때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장인의 기술과 한국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제품을 만들려고 해요. 전통 문양 하나만 넣고 ‘한국 전통’이라고 하는 건 싫었거든요. 식칼의 형태는 물론 역사적 배경까지도 살펴보고 제품을 만들었어요. 무엇보다 타협하지 않았어요. 쉽게 대량 생산 할 수 있겠지만 전통 가치를 담는 데 타협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소비자가 제품을 쓰면서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장인의 기술이 담긴 프리미엄 제품이다’라고 느꼈으면 해요.💡
불 앞에서 피어나는 철의 매력
스스로 제일 자랑스럽다고 생각한 제품은 뭐에요?
‘대령숙수칼’을 꼽을게요. 예전 궁중 요리사인 ‘대령숙수’가 쓰던 칼을 재현한 제품이에요. 1년 4개월 동안 개발했어요. 우리나라의 전통 식칼을 처음 알리고 현대화한 사례라고 하더라고요. 그 반응이 좋았죠.
제품 제작 과정을 들려주세요.
탄소 함유량이 높은 철강 한 덩이를 잘라 화덕에 달궈요. 충분히 달궈진 쇠를 꺼내 파워 해머로 두드려 판재 형태로 만들고요. 이 과정에서 칼날이 될 부분은 얇게, 칼등은 두껍게 조정합니다. 어느정도 형태가 잡히면 달궈진 쇠를 잘라 칼 모양으로 다듬어요. 다음으로 숫돌로 날을 갈고, 광이 날 때까지 연마를 하죠.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끼우면 대령숙수칼이 완성됩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계는 무엇인가요?
연마 단계예요. 숫돌로 갈아 날을 세우는 마무리 작업이죠. 연마 방식에 따라 칼끝이 둥근 만두피 모양이 될 수도 있고, 안쪽이 살짝 파인 부채꼴 모양이 될 수도 있어요. 가장 신중해야 하는 과정이에요.
철의 매력을 느꼈던 순간이 언제인지 궁금해요.
불에 달궈진 금속을 성형하는 과정이 제일 재밌어요. 철은 단단하고 변하지 않을 것 같잖아요. 불에 달구면 엿가락처럼 부드러워져 원하는 대로 형태를 만들 수 있거든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소재가 재련과 가공 과정을 거치면 내 의도대로 변형되고 성형될 수 있다는 점이 금속의 매력인 것 같아요.🫶🏻
'자이너다운 디자인'을 위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자이너는 대장장이과 함께하는 브랜드에요.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장장이가 제품을 만들기까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어떤 기술이 담겼는지 잘 전달된다면, 소비자도 이 제품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폐철에 새 생명을, 업사이클링의 확장
'모루'라는 브랜드로 리뉴얼한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제품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제품이라기보다, 기존 ‘대령숙수칼’을 더 많은 분들이 쓸 수 있도록 라이트 버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와디즈 펀딩에서 1억 원을 돌파할 만큼 반응이 뜨거웠던 제품인데 36만 원이라는 가격이 진입 장벽이었죠. 현재 더 많은 분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장인분들과 상의해 10만 원대 버전을 만들고 있어요. 기술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심플한 디자인을 입힌 버전으로요.
조형미와 기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대장장이와 셰프들을 자주 만나요. 사용자가 보완해 주었으면 하는 점을 듣고, 대장장이에게 해당 내용을 구현할 수 있는지 확인하며 밸런스를 맞추려고요. 저는 그 사이에서 디자이너로서 심미성을 고려했고요.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완벽한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소통과 조율의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타협하기 않는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장인 제품도 별로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처음 이 브랜드의 목표는 장인 생태계를 확장하는 거였는데 지금은 꿈이 더 커졌고요.✨
지금은 어떤 꿈을 꾸나요?
장인, 철 가공 관련 소상공인, 전통 기술 장인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를 운영하고 싶어요. 사회적 가치와 문화, 예술적 영향까지 함께 확장하는 걸 목표로 실현 방법을 고민 중입니다. 그리고 폐철 자원을 활용해 업사이클링 제품을 더 만들고 싶어요. 예전에 산업 현장에서 버려진 철 덩이를 가져와 스패너, 나이프 같은 캠핑 칼로 재탄생시켜 판매했거든요. 한국 대장간만의 고유한 업사이클링 기술이 있다는 걸 확인했고, 실제 제품 제작에도 적용해 본거죠.
업사이클링 나이프
반응이 좋았나요?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어요. 이후 한 철강 회사와 협업할 기회도 있었는데요. 대장장이분들이 폐고철을 ‘에코 나이프’로 재탄생시켰죠. 앞으로도 업사이클링 산업과 관련된 작업을 이어가고 싶어요.🤝
절제와 실용이 빚어낸 한국의 아름다움
한국 전통 금속 공예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사람들이 공예는 이제 한물갔다고 생각해요. 계승자가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고요. 요즘은 AI가 글을 쓰고 영화를 찍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니까요. 어느 날 문득, AI가 절대 할 수 없는 건 뭘까 떠올렸는데, 그게 바로 ‘손으로 하는 모든 것’이더라고요.🙌🏻
공예는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순간 의미를 잃으니까요.
전통 공예는 AI가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이라 분명한 비전이 있다고 봅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장인의 헤리티지 가치는 앞으로 더 높아질 거라고 믿어요.
자이너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백자 항아리처럼 순수하고 담백한 느낌이 떠올라요. 절제와 여백 속에 깃든 아름다움이 좋거든요. 예를 들어, 버선코 식칼의 칼끝은 손목 스냅으로 더 쉽게 베이게 하거나, 거꾸로 잡아 먼 고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만들었죠. 실용성과 미를 함께 담은 선조들의 절제된 지혜가 숨어 있어요. 절제와 실용이 어우러진 담백함이야말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대표님의 손으로 재탄생 된 한국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기회가 된다면 현대제철과 함께 대장장이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전시나 제품 협업을 해보고 싶어요. 한국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금속 공예 리빙 브랜드 ‘자이너(ZAINER)’를 운영 중이며 현재 모루(MORU)라는 브랜드로 리뉴얼을 준비하고 있다. 2024년 대한민국 인재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