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해서 짙은 색의 현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문이 어딘지 모르게 좀 더 고급스럽고 좋아 보였던 기억이 있다. 물론 고생 끝에 내 집을 마련했다는 감정 덕분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 수 있지만, 철만이 가지는 묵직하고 중후한 느낌이 그러한 감성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철문은 지금까지 우리 집 입구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 wikiarquitectura.com 수정궁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제철산업의 눈부신 발전으로 고품질의 철이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철은 건축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활용하기 시작한다.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에 등장했던 수정궁과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등장했던 에펠탑은 철이 건축에서 주연급 재료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수정궁은 영국의 건축가 조셉 팩스턴 경의 설계를 기초로, 개최 연도에 맞춰 길이 1,851피트(564m), 높이 39m에 이르는 규모로 지어졌다. 수정궁은 다른 재료 없이 오직 철과 유리로만 지어졌는데, 철의 가공성과 강도 등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당시 기술로도 이 정도의 대 공간을 만들 수 있었고, 단 5개월만에 완성되기도 하였다.
© htheophile 경첩
철은 곧 문의 재료로도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이전 시대에 주로 활용되었던 목재에 비해 높은 내구성과 가공성을 바탕으로 문에 반드시 필요한 안전성과 기밀성 측면에서 우수했기 때문이다.🛠️ 철을 사용함으로서 자물쇠 등의 안전성 높은 시건 장치를 적용할 수 있었고, 철로 만든 손잡이나 경첩, 도어 스토퍼, 도어 클로저 등 각종 부자재들을 활용해 문을 안정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었다.
© Pinterest BarteskyNatacha 아르누보 스타일의 문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은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었다. 식물의 잎이나 덩굴 등 자연을 모티브로 한 유려한 곡선들이 자주 나타났는데, 이런 요소들을 철로 가공하여 문의 개구부 가장자리나 손잡이 등의 장식에 활용했다.🍃 철의 높은 강도와 가공성을 적절하게 활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건축에서 주로 쓰이는 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목문과 철로 만들어진 철문이다. 목문은 주로 실내에 적용되며 따뜻한 외관과 함께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비바람과 한기 등을 차단하고 보안이 필요한 외부 문으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 clipartkorea 방화문
철문은 외부에 달리는 문에 주로 쓰이며, 흔히 ‘방화문’이라고 불린다. 방화문은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화재 확산을 막고 대피로 역할을 하기 위해 건물 출입구나 복도, 계단 통행로에 설치되는 문이다. 나무나 유리 등 다른 재료로 만들 수도 있지만, 화재에 강한 철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철문을 ‘방화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화재에 강한 것 이외에도 특유의 광택을 활용한 외관이 고급스럽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내부에 단열재를 충진해서 높은 단열 효과를 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각 세대에 들어가는 현관문은 대부분 철문으로 제작된다.
현관문 이외에도 담장에 달리는 외부 출입문, 공장 등의 대형 출입문에도 철문이 주로 적용된다. 최근에는 빈티지한 카페의 출입문에도 철문이 적용되는 사례가 많다.☕ 흔히 구로철판이라고 불리는 열연강판은 특유의 짙은 검은색 색감이 매력적이라 내장재나 계단, 난간 등에 자주 쓰인다. 문에 적용되면 목재나 노출콘크리트 등의 재료와 굉장히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자주 활용된다.
© anthracitecoffee 앤트러사이트 합정점
엔트러사이트 카페는 인더스트리얼하고 빈티지한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합정동에 있는 엔트러사이트는 공장으로 쓰였던 건물을 최소한의 리모델링을 거쳐 거의 날것 그대로 사용해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카페의 출입문 역시 예외 없이 오래된 공장의 그것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공장의 거친 감성을 그대로 살린 모습이 이채롭다.
© sn-architecture
에스엔(SN)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카페 포옥(Po.oak)은 노출콘크리트와 벽돌, 유리 등의 재료를 사용해서 감각적인 카페 건물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요소 중 하나가 구로철판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주출입문이다. 회전하는 형태의 이 거대한 철문은 방문자에게 도심지에서 일반적으로 흔히 접하는 카페와는 다른 세련된 감성을 선사한다.
© archjourney
건축계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는 전 세계에 숱한 걸작들을 만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작 중 하나가 포르투칼에 있는 산타마리아 성당이다. 순백의 회벽으로 마감된 이 건물은 독특한 조형감을 뽐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무려 10미터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철문이다.🚪 내부의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철문을 이렇게 독특하게 처리했는데, 이렇게 거대한 문은 예배당의 높은 공간감을 암시함과 동시에 종교적으로 완전히 정결한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정도의 크기의 문은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에 열고 닫는 과정 또한 쉽지 않다. 성당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체험을 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건축에 있어서 문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로서, 새로운 공간이나 장소로 들어선다는 ‘절차’로서, 단열이나 보안, 차단설비가 집중되는 ‘장치’로서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의미들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담아내는 것이 좋은 건축에 있어서 문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철문은 특유의 묵직하고 단단한 질감과 함께 내구성과 가공성 등 문에 적합한 성질을 다양하게 갖춘 재료이다. 건축의 발전과 함께 문의 의미도 변화하겠지만, 철과 함께한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건축에서 다양하게 활용될 철과 그것을 활용한 철문의 미래를 기대한다.
오픈스튜디오 건축사무소 김선동 대표
크고 작은 사무실에서 10년 정도 실무를 익히고 2021년 오픈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했다. 건축가와 건축주, 시공사가 함께하는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글쓰는 건축가'라는 필명으로 블로그와 브런치 등 저술과 강연활동 또한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