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인생의 방향을 바꾼 계기를 묻는다면 결혼과 출산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큰 전환점이니까. 하지만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변곡점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자전거를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엔 누구나 두 바퀴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성장하지만 성인이 된 뒤 다시 자전거를 꺼내 드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모험이다.
어릴 적 내게 자전거는 소중한 장난감이자 작은 교통수단이었다. 집 앞 골목에서 친구들과 경주를 벌이는 놀이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친구네 집을 찾아가고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게 해주는 가장 든든한 이동 수단이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나서야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는 것 같았고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모험이 열리곤 했다.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동네를 탐험하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 느낌을 조금 더 선명하게 표현하자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구니스>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탐험하는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속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모여들던 장면과 유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우정과 용기로 악을 물리치거나 보물을 찾은 적은 없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면 두 바퀴 위에서 시작되는 방과후 활동은 여지없이 같은 모습이다. 이렇듯 자전거는 단순한 탈것 이상의, 나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무대였다.
날씨가 좋은 봄가을에는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기억이 얽혀 있을 자전거는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원시적인 형태였지만, 이는 내구성과 안정성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철제 프레임과 바퀴, 체인 같은 금속 부품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철은 강인하면서도 가공이 쉬웠기에 이전보다 훨씬 견고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전거 제작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대량 생산 체계와 맞물리며 가격을 낮추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곧 자전거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이동 수단’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그것이 단순한 이동 수단이었는지, 혹은 레저나 모험의 도구였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자전거는 도시의 풍경을 바꾸었고,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켰으며, 무엇보다 누구나 바람을 가르며 속도가 가져오는 자유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 새로운 도구였다.
중고 경륜 프레임으로 만든 자전거
내가 성인이 된 뒤 자전거와 다시 깊게 연결된 시기는 호주에서였다. 2006년, 인적이 드문 엘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라는 사막 마을에서 살았던 나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자전거는 그곳에서 생존에 가까운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어느 저녁, 퇴근길에 음주 운전 오토바이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한동안은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 병상에 누워 다시는 자전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은 내 삶에서 자전거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공백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마주한 *싱글 기어 자전거와 **메신저 문화는 잊고 지내던 두 바퀴에 대한 갈증을 단숨에 깨워냈다.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즐기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지만 묘하게도 그 안에는 내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할 힘이 숨어 있었다. 나는 중고 경륜용 자전거를 하나 들여와 직접 조립하고, 부품을 바꿔가며 부족한 것들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함께 땀을 흘리고 바람을 가르며 비슷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서울 곳곳을 달렸다. 한강 변의 매끄러운 자전거 도로부터 골목길의 거친 포장도로까지.
*싱글 기어 자전거 : 흔히 픽시(Fixed Gear
Bike)라고도 하며, 기어가 하나뿐인 자전거로 변속기 없는 단순한 구조의 자전거를 말한다.
*메신저 문화 (Bike Messenger Culture) : 도시 속에서 자전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태도, 스타일을 포괄하는 하나의 문화를 말한다.
나의 20대를 설레게 만든 콜럼버스 튜빙(Columbus Tubing). 이탈리아의 고급 자전거 프레임용 강철 파이프(튜빙)를 만드는 전문 브랜드다.
그 시기, 나와 함께 했던 자전거 프레임은 흔히 크로몰리라고 불렀지만, 사실 옴니크롬 스틸(Omnicrom Steel)이라는 클래식 합금강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뭔가 대단히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철에 크롬과 몰리브덴, 망간 등을 섞은 합금강이다. 요즘 유행하는 카본처럼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지 않았지만 달리다 보면 특유의 묵직함 속에서 익숙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노면의 진동을 부드럽게 받아내는 감각은 마치 오래된 소파에 몸을 묻는 듯했고, 몇 번의 스크래치와 작은 녹마저도 그 자체로 멋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가볍고 빠른 걸 더 좋아했지만 나는 오히려 이 단순한 형태의 철 프레임이 주는 든든함이 마음에 들었다. 크로몰리는 완벽해서 매력적인 게 아니라, 흠집과 무게까지도 함께 안고 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옴니크롬 스틸(Omnicrom Steel)로 만들어진 자전거 프레임
그 중심에는 늘 ‘철’이라는 물성이 있었다. 옴니크롬 스틸(Omnicrom Steel)은 튼튼하고 가볍게 만들어내려는 합금강을 넘어서 시간을 견디며 스스로의 표정을 만들어가는 소재였다. 얇게 뽑아낸 튜빙이 이루는 직선의 조합은 구조적 긴장감을 품고 있었고, 용접부(러그)에서 보이는 섬세한 세공은 장인의 손길을 증명하듯 아름다웠다. 표면에 덧입혀진 도장 너머로도 느껴지는 밀도와 묵직함, 주행할 때 만들어내는 소리는 다른 어떤 재료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고유한 질감이었다. 디자이너로서 나는 철의 이 단단한 선과 면이 만들어내는 조형미에 끌렸고, 시간이 흘러 흠집과 산화가 더해질수록 오히려 완성되어 가는 그 과정을 매혹적으로 바라보았다.
강원도 고성에서 해운대을 거쳐, 땅끝 마을로 자전거 여행 중
그 자전거와 함께하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달린 게 아니라 같은 목적지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성인이 된 후 20년 가까이 자전거를 타며 배운 것들은 의외로 단순한 것들이었다. 오르막은 늘 벅찼지만, 그 끝에는 시원한 내리막이 기다렸고, 속도가 빠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가끔은 멈춰 서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멀리 가는지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누구와 함께 달리느냐’라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먼지를 털고 체인에 기름을 발라 다시 달리던 순간들 속에서 철 프레임은 내 삶의 리듬을 함께 견뎌낸 동반자였다. 자전거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은 단순한 기계적 기능을 넘어선 삶의 태도였다. 속도보다 지속, 경쟁보다 동행, 순간보다 시간의 흔적. 철 위에서 달린 세월은 곧 나의 이야기로 쌓였다.📖
철로 만들어진 자전거와 함께한 시간 속에는 묵직하면서도 지속적인 매력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영화 <구니스>에서 아이들이 모험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발견하던 경험과 닮았다. 자전거는 모험하는 열쇠였고 나에게도 그런 존재였다. 바퀴가 굴러가는 동안 길은 공간을 잇는 선을 넘어 이야기를 축적하는 기록과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철은 그 기록을 지탱하는 구조물로서 지금까지 내 삶의 궤적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다.
디자이너 정승민
삶의 다양한 경험들을 기록하며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시대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디자이너. 현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제품을 만든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TRVR’과 ‘TRVR’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