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차 금속공예가이자 워치메이커로 활동 중인 현광훈 작가는 금속을 깎고 다듬는 일에서 시작해 시계와 카메라,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 장치인 오토마타(Automata)까지 제작하며 작업 세계를 스스로 넓혀왔다. 손으로 만든 구조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작업하는 그는, 모든 시도를 ‘실패’가 아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현광훈 작가는 ‘금속공예’가 기능과 메커니즘을 품은 더 넓은 분야로 확장되길 바란다.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그의 작업은 금속이라는 단단한 재료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다.
핀홀 카메라가 열어준 구조의 세계
‘What time is it now?’ (2025), ‘Owl’ (2022)
시계, 카메라, 오토마타 등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정교함과 디테일에 놀랐어요.
첫 작품이 ‘핀홀 카메라’였다고 해서 흥미롭더라고요. 시작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대학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면서도 사진 입문 수업을 들었어요.
당시 직접 카메라를 만들어 촬영해 오는 과제가 있었는데, 대부분 종이나 박스로 간단히 만들더라고요.
저도 처음엔 종이로 만들다가 ‘금속으로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금속으로 제작해 제출했고,
그게 제 첫 핀홀 카메라 작업이 됐습니다.
여기에 있어요?
이게 대학생 때 만들었던 카메라예요.
카메라 작업을 시작으로 지금은 워치 메이커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카메라에서 시계로 영역을 넓히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카메라는 결국 ‘셔터 시간’에 의해 작동하는 장치잖아요.
그 시간을 스스로 제어하는 구조를 직접 만들어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구현할 수 있을까 방법을 찾다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구조가 기계식 시계라는 걸 알게 되었죠.
자연스럽게 ‘시계를 만들 수 있으면 내가 원하는 카메라도 만들 수 있겠다’는
결론에 닿았던 것 같아요.
작업실 내부
카메라와 시계를 만드는 방법 모두 독학으로 배우셨다고요.
시계 장인들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서 기계를 구입하고,
도구를 수집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2009년 당시에 처음 시계를 만들려고 보니 시계 제작에는 정해진 답이 없는데다,
배울 곳도 마땅치 않았어요. 시계 제작자들이 노하우를 잘 공개하지 않아서
참고할 만한 자료나 책도 거의 없어서 시계 제작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 속 작업실 풍경에서
단서를 얻을 수밖에 없었어요. 책상 위에 놓인 도구들을 보고 이베이나 아마존에서
중고로 찾아 구입해 사용해 보면서, ‘이 도구는 어떻게 쓰는 걸까?’를 스스로 연구하며
2~3년간 시행착오를 겪었고요.
시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던 방법은 기존 시계를 분해하고 구조를 관찰한 뒤 다시 조립해 보는 것이었어요. 내부 부품 대부분이 금속이다 보니 금속공예 전공자로서 금속을 다루는 데 익숙했던 점이 많은 도움이 됐죠. 2012년에 처음 구상했던 카메라를 완성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시계를 완성한 건 2016년이었어요. 시계 제작만 놓고 보면 약 6~7년을 독학으로 배운 셈이네요.
시행착오를 굉장히 많이 겪었을텐데 중간에 멈추고 싶지는 않았나요?
작업 자체가 늘 ‘실패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실패가 힘들다거나 두렵지는 않아요.
저는 장인처럼 완성된 하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연구하고 실험해 보고 다시 돌아오면서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에 가까워요.
만들고 싶은 지점이 있고, 그곳에 닿기 위해 여러 번 만들어 보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또 다시 만들어 보는 과정의 반복이죠.
시행착오는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들이고,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거나 ‘왜 이 직업을 선택했나’ 같은 고민은 해본 적이 없어요.
여전히 작업이 재미있고, 만들고 싶은 게 떠오르면 직접 연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이
즐거워서 계속 이어가고 있어요.
비전을 실현시켜주는 존재, 금속
카메라나 시계는 완성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잖아요.
두 작품의 과정이 다르긴 하지만, 어떤 흐름으로 작업이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카메라와 시계 모두 기본적인 베이스는 비슷해요. 금속 원자재를 자르고, 다듬고, 사포질하고,
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가죠. 일반적인 공예 작품이 한두 개의 큰 단일 부품이
결합되는 정도라면, 시계나 카메라는 훨씬 작은 부품들이 수십, 수백 개 필요합니다.
보통 100개가 넘는 부품을 직접 만들어야 하고요. 마지막에는 그 부품들을 하나씩 맞춰
전체 구조를 조립해 나가는 과정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예요.
제작 과정에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단계가 있을까요?
안에 들어가는 톱니바퀴 같은 부품은 정말 정교해야 해요.
조금만 비뚤어져도 맞물려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톱니를 깎는 과정에서 실패하고
다시 만드는 경우가 많죠. 아주 미세하게라도 어긋나면 전체 구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정해서 쓰기보다 새로 만드는 게 더 빠를 때가 많습니다.
20년 넘게 금속을 다루며 작업해 오셨는데요. 금속은 어떤 매력을 가진 재질인가요?
정직하고 솔직한 소재예요. 다른 재료보다 변형이나 마모가 적어서
제가 원하는 형태로 정확하게 깎고 다듬어만 주면 그 상태 그대로 오래 존재하거든요.
내가 만든 대로 구현된다는 믿음을 주는 것, 그게 금속이 가진 가장 큰 매력입니다.
작업할 때 가장 많이 쓰는 금속 소재는 무엇인가요?
황동과 탄소강이에요.
황동은 절삭성이 좋아서 정밀한 치수를 맞춰 깎아야 하는 작업의 특성에 잘 맞고,
탄소강은 탄성과 내마모성이 필요할 때 쓰입니다. 특히 탄소강은 원하는 형태로 정밀하게
가공한 후 담금질을 하면 금속의 성질이 변해 더 단단해지고 변형도 거의 없거든요.
부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 작업에서는 소재의 성질이 큰 영향을 미쳐요.
시계, 카메라, 오토마타까지 모두 아날로그 기반 작업인데요.
특별히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디지털을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웃음). 다만 직접 손으로 구조를 만들고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물리적인 장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날로그에 마음이 가요. 기계식은 작동 원리가 눈앞에서
드러나고, 고장 나도 뜯어보면 이유를 찾을 수 있죠. 시간이 걸려도 결국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반면 디지털 회로나 코드는 한 번 문제가 생기면 그 구조를 아는 사람이 없으면
복원이 어렵습니다.
저에겐 작품이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오브제’로 남는 것이 중요해서,
누구나 열어보고 이해하고 고칠 수 있는 아날로그식 구조를 더 선호합니다.
작가님의 작업을 묶어주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기계적인 구조, 메커니즘입니다.
카메라와 시계는 모두 ‘시간’을 다루는 기계잖아요. 작가님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시계를 만들지만 시간 자체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에요.
다만, 시간이라는 가치가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늘 작업에 쫓기다 보니, 어떤 선택을 할 때도 가장 먼저 시간을 고려하게 되더라고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을 두고 보면 저는 작업을 선택할 것 같아요.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지만 시간은 한 번 지나면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제 삶과 작업의 방향을 결정할 때 시간은 꽤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금속공예가 닿을 수 있는 세계를 넓히는 일
작업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궁금합니다.
흥미를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은 ‘가볍게 즐긴다’는 의미보다, 치열하게 몰입하면서 얻는 즐거움에 더 가까워요.
실패해도 왜 그랬는지 계속 고민하고, 자기 전에 ‘다음엔 어떻게 다르게 시도할지’를 떠올리고,
작업실에 오면 바로 실험해 보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워요.
그리고 한 번 정상에 올랐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계를 만들고, 카메라를 만들고, 오토마타를 만들었던 것처럼 계속 새로운 걸 찾아가야 흥미가 유지되거든요. 관심사를 확장하고, 몰입할 수 있는 상태를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 그게 제가 지키고 싶은 작업 태도입니다.
'First Clock' (2023)
계속해서 새로운 걸 계속 찾는다고 하셨죠. 작가님은 보통 어떤 것을 보면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나요?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습관을 의도적으로 유지하려고 해요.
배전판이나 난간, 버스 하차벨처럼 아주 일상적인 것들을 볼 때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작동할까?’를 떠올리며 구조를 상상해 보죠.
필요하면 직접 찾아보기도 하고요.
관찰과 분석이 결국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디지털과 AI가 중심이 되는 시대인데, 그와 반대로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잖아요.
앞으로 금속공예 분야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보나요?
금속공예가 앞으로 더 주목 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디자인 계열이 워낙 유망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했는데, 요즘은 AI가 등장하면서 그 분야의 시장이 예전만큼 크지 않은 것 같아요.
반대로 공예는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이에요.
공예는 언어 기반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드는 물리적 행위’이기 때문에 기술이 대신하기 힘들죠.
무엇보다 독특한 개성이 담긴 작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점점 확장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워치메이커로서 국내에서도 확고히 자리 잡으셨고, 해외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작가로서 앞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금속공예 안에서 기계장치를 만드는 일은 예전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한 분야였어요.
기능이 있는 사물은 ‘작품이 아니라 제품’로 여겨지고, 순수 조형 작업이 더 인정받던 분위기였죠.
그런데 지금은 대량생산품보다 손맛과 구조적 개성을 가진 작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이런 흐름 덕분에 제 작업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받게 된 것 같고요.
앞으로도 금속공예 안에서 기계장치를 만들고, 기능과 구조를 탐구하는 지금의 작업을 깊게 이어가고 싶습니다.
후배들이 이 분야를 계속 확장해 나갈 수 있도록 저 역시 조금 더 영역을 넓혀 보고 싶고요.
훗날, 어떤 금속공예가로 기억에 남고 싶나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연구하며 길을 열어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금속공예가 더 다양한 영역을 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계장치를 이용한 작업도
충분히 작품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예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워치메이커 현광훈
워치메이커이자 금송공예가로 활동하며 금속공예 분야 중 기계장치 작업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